「마을」은 우리 생활의 기초 단위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최소의 자연촌락으로, ‘말’ 또는 ‘마실’이라고도 하며 정감의 대명사로 많이 사용된다. 영어로는 village(마을), community(지역사회), rural community(농촌사회)라고 쓰기도 한다. 중국의 촌락(村落)·향리(鄕里)와 유사한 표현이지만, 「마을」은 우리 민족 고유의 호칭에 속한다.
하지만, 정작 마을에 가서 ‘이 마을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단촌1리’, ‘조제2리’라고 대답하지 ‘저술’, ‘샛골’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퍽 드물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사는 마을 이름을 모르는 사람까지 있다. 귀촌인의 경우는 좀 더 심한 편이다. 하기야, 마을 정착 절차를 밟는 동안에 한 번도 마을 이름을 요구한 곳은 없었기에 그들은 일부러 ‘배남실마을’ 식의 마을 이름을 들춰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에도 그것 때문에 어떤 불편한 일도 겪지 않았을 것 같다. 여기에다 마을 단위의 행사가 거의 없어졌다는 점도 마을 이름 실종에 한몫한 듯하다. 두부마을, 초록마을, 누리마을 등 가게 이름에는 곧잘 붙여져 사용되는 세태이나, 배고개, 뒤실, 논골마을 등 순수한 우리네 마을 이름들은 점점 낯설어지는 느낌이다.
「마을」은 특정한 입지 조건을 가진 곳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지연적(地緣的) 생활공동체이다. 특별히 ‘자연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자로 기록할 때는 동(洞)이나 촌(村) 또는 촌락(村落)이라 표기했다. ‘도화동’, ‘연화동’에서의 ‘洞’은 우리 고유의 ‘골’, ‘골짜기’이란 뜻에서 출발했기에 ‘동네’와는 비슷하면서 조금 다르다.
특히, 일제가 도회지 행정구역명에 일률적으로 붙인 ‘하망동’, ‘휴천동’의 ‘洞’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촌락을 ‘부락(部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원래 조선의 ‘부락’은 백정촌, 재인촌에 비견될 만큼 소위 야인(野人)의 무리를 일컫는 용어였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격하하여 ‘부락’이라는 용어를 모든 마을에 적용한 것이다.
당초 우리나라는 자연촌락 중심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를 1914년 일제가 통치 효율성을 이유로 몇 개의 마을을 묶어서 행정 촌락인 법정리(法定里)로 설정하여 명예직인 구장(區長, 이장)이 행정 실무를 뒷바라지하게 하였다. 이른바 군·면·리 통폐합 사건이다. 이로써 마을 이름은 물론 마을의 정서가 크게 상실되는 아픔이 시작된 것이다.
일제의 행정 편의주의 경계는 수시로 변경될 수 있으며, 주민들의 소속감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명절, 동제(洞祭) 등의 마을 단위 행사들을 모두 무속적인 것으로 치부하였다. 이에 따른 마을의 원형 변형과 함께 마을의 권위 추락이 끝없이 진행되었다. 마을 주민들을 단합시키기 위한 마을 행사들이 식민 통치의 저해 요소라고 판단한 일제의 제동 때문이었다. 농악 놀이는 의례뿐만 아니라 명절, 잔치, 두레, 운동 경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빠지지 않았던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지만, 일제는 이들을 모두 미신화시켰다.
일본의 식민 통치로 한국의 전통문화는 크게 붕괴되었고, 자치 조직, 협동 조직, 공동 유희 등은 축소되거나 소멸되었다. 더구나 촌장과 동네 어른들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마을의 권위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그들은 가장 성공한 식민 통치의 하나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꼽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네들이 자기식으로 급조한 행정 지명이 100년을 훌쩍 넘기도록 훌륭히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지역은 아직도 창지개명의 오명 속에서 허덕이는 실정이나, 최근 삼남(三南)을 중심으로 마을 이름은 물론 마을 협력체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어 퍽 다행스럽다. 이참에 마을표지석, 안내판 정비를 비롯한 「마을 르네상스」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