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어디에나 경치가 좋은 계곡에는 구곡(九曲)이나 동천(洞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동천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라는 의미로 구곡과 비교해서 짧은 계곡에 둔다. 구곡은 산속 계곡의 아홉 굽이를 뜻한다. 풍광이 좋은 굽이마다 구곡을 정해 시도 짓고 그림도 그리면서 학문의 터전으로 삼았는데 조선시대 선비들의 핵심 문화였다. 중국의 주자가 무이정사를 짓고 구곡을 설정해 구곡을 따라 유람한 뒤 ‘무이도가’를 지은 것이 구곡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구곡이 분포되어 있는데 영주에만 죽계구곡, 동계구곡, 운포구곡, 무도칠곡, 초계구곡, 소백구곡, 초암구곡 등이 있다. 분포된 비율로만 보더라도 영주는 어느 지역보다 많은 구곡을 가지고 있다. 이는 소백산과 그 자락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흐르고 뻗어가는 산수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연에 묻혀서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선비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계간 『영주문화』 가을호에 ‘영주의 구곡문화’ 특집을 준비하면서 구곡 사진 촬영을 하러 다녔다. 과연 옛 선비들이 정해 놓은 구곡의 풍광은 남달랐다. 솟아 오른 바위가 있는가 하면 널찍하여 쉴 수 있는 반석도 있고 물이 굽이쳐서 못을 이룬 곳에다가 단풍이 어우러져서 눈에 담아 오고 싶은 풍경도 많았다. 여기에 시까지 더하니 옛 선비들의 학문의 깊이와 풍류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잘 보존되어 아직도 선비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구곡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구곡도 수두룩했다. 물론 도시의 확장이나 수로 정비 사업으로 인해서 모든 구곡이 보존될 수는 없지만 그 원형이 남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사진을 촬영하는 우리 자신이 오히려 사라져 버린 옛것을 부여잡고 못난 씨름을 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서글펐다.
초계구곡은 동구대와 서구대에서 출발하여 적서교 근처에서 끝이 나는데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렵다. 영주 대홍수로 흐르던 서천의 물길을 산을 잘라 물길을 돌리고 서천을 정비할 때 대부분 없어졌다. 거기에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서고 한정에는 폭포가 생겼으니 아무것도 볼품 있게 남아 있는 구곡이 거의 없다. 자연보다는 오히려 편리하게 살고 싶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이 초계구곡을 없애버렸다.
무도칠곡은 무섬에서 출발하여 미담이라 불리는 조제리에서 끝이 난다. 무도칠곡을 다니면서 분명히 여기다 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곳도 있었고, 하천 정비로 인해서 흐름이 변경된 구곡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 흐름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아마 무섬을 위시하여 내성천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빗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며 다행스러웠다. 무도칠곡에는 시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디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운포구곡은 내성천에 굽이도는 경승에 구곡을 정하여 산수를 즐기고 시를 남겼다. 무섬마을 뒤편에서 시작하여 평은면 금광1리에 이르기까지 내성천 곳곳에 구곡을 정하고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 읊었다. 4곡까지는 아직은 미미하게나마 구곡이 남아 있지만 5곡부터는 영주댐 건설로 물속에 잠겼다. 내성천의 모래와 바위, 그리고 계곡이 어우러지는 절경이 많았으나 이제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원형이 잘 보존되지 못한 구곡을 찾아서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과연 개발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도시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아무리 비대해져도 한계가 뚜렷한 영주와 같은 중소도시에서 우리는 어디까지를 보고 개발하고 훼손해야 하는지 깊은 생각을 했던 하루였다. 아직도 영주가 내세우고 있는 것이 자연이나 옛것이 대부분이라면 지킬 것은 고집스럽게 지키고 허물 것은 어디까지인지 정말 문화계 지도자들과 공무원들의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