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이날은 일제 치하로부터 국권을 회복한 날이므로 자못 그 의미가 깊다. 3년 뒤 같은 날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 되었기에, 어느 국경일보다도 가장 경사스러운 날이 되었다. 내년이면 그 80주년이 된다. 벌써부터 80주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서로 자신들이 개최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해 우리 지역은 유난히 광복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들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풍기는 전국 최초로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된 곳이다. 1913년 풍기 한림촌에서 조직된「대한광복단」을 말한다. 풍기에서 결성되었으므로 속칭 ‘풍기광복단’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대한광복단」에는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계몽운동가, 영남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결집되었으며, 비밀 결사로 조직되어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주요 인사로는 채기중(상주)ㆍ유창순(천안)ㆍ강순필(봉화)ㆍ정만교(풍기) 등 제씨들이다. 이들 「대한광복단」은 1915년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의 발전적 통합으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풍기의 「대한광복단」은 그 활동 범위가 국외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일제 치하 국내 활동이 어려웠던 만큼 이후의 조선혁명군, 대한독립단,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독립운동 단체는 대부분 만주 등지에서 결성되었다.
혹자는 풍기의 「대한광복단」 비밀 결사 조직이 너무 철저하여 광복 후에도 그 활동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로 1987년 천안의 『독립기념관』 유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실제로 「대한광복단」 조직 강령은 전국 어느 단체보다도 강력하여 일제강점기 전 기간은 물론 광복 이후까지도 철저히 은폐되었다고 한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탄로가 났을 때도 그 전신인 풍기의 「대한광복단」 결성 사실만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활동 내용이 모두 가명이나 익명으로 처리되고 활동 내용 또한 철저히 베일로 가렸던 만큼 늦게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그때 생존 단원이었던 한훈(韓焄) 지사에 의해 비로소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다 보니, 비교적 공개적이었던 유관순의 천안 만세운동보다 훨씬 늦게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어 불리하게 되었다는 논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목숨을 내건 풍기의 「대한광복단」 활동은 실제 활약상보다도 훨씬 저평가되어 있다고들 입을 모은다. 나아가 전 국민의 ‘3.1만세운동’보다 6년이나 앞선 「대한광복단」 활동이었기에 ‘3.1만세운동’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역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만주 간도 청산리전투에 빛나는 김좌진 장군이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대한광복단」의 일부 단원들이 건국훈장에 추서되고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많은 단원이 발굴을 기다리면서 음지에서 잠들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에서는 지속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118명의 공로자를 새로 찾아내었고, 이를 국가보훈부가 검토하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을 병행해나갈 작정이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풍기 동양대학교 부근의 ‘대한광복단기념공원’ 내에 주재하고 있다. 해마다 3.1절 및 8.15 광복절 등의 기념행사를 나누어 치르고 있다. 이곳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기념공원이기에 민족 최대의 국경일인 광복절을 맞아 만세 소리가 가장 크게 울려야 할 곳이 이곳일 것 같다.
금년에는 <국가보훈부>의 ‘지구로 떨어진 무궁화’와, <천안 독립기념관>의 ‘그날이 오면’ 행사를 필두로,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산청유림독립기념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울산충의사>, <강원광복기념관> 등에서 다채로운 광복절 기념행사가 개최된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서도 누구가 주관하는 광복절 행사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진 광복절 기념행사로 전환되는 광복절이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