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곡 마을 출신의 단곡(丹谷) 곽진, 1568~1633)에게는 ‘조선의 대학자’, ‘영남 오현’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그의 비문을 보면, 그는 조선 중기 명종 23년 풍기 고로촌(古老村, 서부3리) 출생으로 나와 있다. 판관을 지낸 할아버지[현풍곽씨]가 처가인 봉화현으로 와서 살다가 생원이었던 아버지 곽한(郭澣)이 풍기로 옮겼으며, 아버지가 소백산 아래 질막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곽진의 질막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곽진은 4살 때부터 글을 배웠고, 6세 때는 벌써 몸가짐이 의젓했다. 8세에 문장을 짓기 시작했으며, 10여 세에 이르러서는 장편의 시를 써 사람들이 회자하였다. 성장 후에도 학문에 정진하여 여러 유학 서적을 두루 섭렵했으며, 의학과 천문, 지리, 병서 등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33세에는 향시(鄕試)에서 장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광해군의 스승이었던 송소(松巢) 권우(權宇)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3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이후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사림들에 호소하는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형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덮친 격으로 전란 중 양친(兩親)의 상(喪)을 연거푸 당해 복상(複喪)을 치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단산면 질막 마을에 들어와 은거하였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단곡산(丹谷山)으로 들어가 작은 암자를 짓고 스스로 ‘단곡처사(丹谷居士)’라 칭하며, 『심경』·『근사록』·『주서절요』 등 서적을 취하여 자신의 본마음을 찾기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깊이 심취하였다.
36세에 광릉 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날로 그릇되는 시국을 보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30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만취당 김개국, 백암 김륵, 취사 이여빈, 수서 박선장, 물암 김륭, 학사 김응조, 과재 장수희, 계암 김령 등 지역의 소수 문인만 교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서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할 만큼 독서량이 많았는데, 특히 『심경(心經)』 등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좋아했다. 학문이 깊어지고 몸가짐이 근엄해지자 그의 학문을 배우려는 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어 문도가 무려 70여 명이 넘었다고 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 터가 지금도 ‘서당골’로 남아 있다.
조보양(趙普陽)이 쓴 곽진의 행장에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시를 읊고 배회하였다. 산수 전원의 흥취와 한적미(閑寂美)가 잘 드러난 시를 많이 썼다”고 했다. 200수가 넘는 그의 시 세계는 대체로 처사적 풍류가 우세한 가운데, 당대 농촌 현실에 관한 관심을 나타낸 작품이 간혹 엿보일 뿐 현실 비판적인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이다.
또, 묘갈명에는 “글을 지으면 마치 구름이 일 듯, 물결이 출렁이는 듯 도도하여 끊임이 없었다. 오직 성품이 곧아서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고 마침내 비방을 받았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임종하던 날도 정신이 흐리지 않고 죽은 뒤의 일을 당부하였다. 이어 생전에 가까이 교유하던 유림 20여 명을 직접 입으로 불러 기록하도록 지시할 만큼 초롱했다”고 전한다.
인조 11년 65세의 일기로 자신이 지은 은구당(隱求堂)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명(遺命)에 따라 곧 집 뒤쪽 단곡산록에 묻혔다.
단곡 선생은 22세부터 소수서원에 출입하여 40세에 첫 원장을 역임하였고, 7년 뒤에 다시 원장에 추대됨으로써 생애 두 번씩이나 소수서원 원장을 지내게 된다. 원장 시절 『근사록』·『주서절요』 등을 강론하면서 서원을 보수하고 꽃나무, 대나무를 심었다고 「소수서원지」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평생을 기거했다는 질막 마을에는 한 가구 후손도 없어, 오로지 그를 기억하는 건 간암대(榦巖臺) 위에 그가 심었다는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 한그루뿐이라고 한다. 후손이 없는 그의 묘소는 어쩔 수 없이 외손[奉化琴氏]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