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들은 구구리를 말한다. 구구는 아홉 九, 언덕 구(邱)를 써서 아홉 언덕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구구는 아이들에게 늘 놀림감이 되었다. 현재 주공아파트가 자리한 곳에 영주종합운동장이 있었다. 가을이면 영주학생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영주시, 영풍군에 있는 초중고 학생들이 모여서 학생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때 영주시에 살고 있는 학생들이 구구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를 보고 ‘구구 달구똥’ 하며 놀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선생님들에게 학교 이름을 바꿔 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구두들이 아홉 언덕이라고 해서 어릴 때부터 언덕 아홉 개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애를 써봤으나 아무래도 그렇게 많은 언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철이 들어서 알게 됐는데, 구두들에 구고서원(九皐書院)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고서원은 1780년 돈암(遯菴) 서한정(徐翰廷)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폐를 모신 서원이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구두들 앞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도인봉 아래에 구고서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구고서당이 너무 퇴락하여 현재 새내마을로 이건하면서 구고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구고서원의 구고(九皐)는 깊숙하고도 먼 곳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시경에 ‘구고에서 학이 우니 그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고 했다. 고(皐)는 깊숙하고도 먼곳이라는 의미와 함께 높다거나 언덕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지금이야 지방도 옆에 마을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소백산 골짜기 안에 있으니 깊고 높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의 행정구역 명칭 변경으로 언덕의 의미를 지닌 고(皐)를 구(邱)로 바꾸면서 구구리(九邱里)가 되었다.
구두들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면 배나무실이 있다. 배나무실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洪儒漢)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것이 1784년인데 이보다 30년 앞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수련한 분이 바로 홍유한 선생이다. 천주교를 신학문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천주교를 마음 깊이 받아들여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을 철저하게 천주교 수덕 생활과 기도에만 전념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두들은 달성 서씨와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다. 친구들도 대부분이 남양 홍씨 성을 가졌다. 홍씨 성을 가진 친구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야 독가촌(獨家村) 신세를 면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문제는 할아버지께서 홍씨 성을 가진 친구들과 같이 놀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 몰래 친구들을 만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지금도 할아버지께서 홍씨 성을 가진 친구들과 놀지 못하게 한 이유를 모르겠다. 당시의 어른들이 기독교나 천주교를 서학이라고 하여 멀리하려고 했던 그런 이유인가 그냥 추측만 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어린 손자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다. 종이가 귀한 때라 나무 상자에 모래를 가득 넣고 손가락으로 천자문의 한자들을 썼다 지우곤 했다. 가끔은 배운 한자를 잊어버려서 뽕나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친구들은 학교 다녀와서 들에서 신나게 노는데, 어려운 한자를 배우고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랬던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맨 앞에서 만장(晩裝)을 들고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보다 천자문에서 해방됐다는 마음으로 만장을 흔들었던 기억이 무척 죄송스럽다.
생각해 보면 추억도 그 시대의 생활양식과 무척 관련이 깊은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추억에는 그 시대의 문화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일들은 망각 속에 묻혀 버리고 우리 기억 속에 없다. 문화 중에서도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만큼 문화는 중요하다. 문화는 그 시대의 장식물이 아니다. 가장 우리 가슴에 진하게 남을 추억의 자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