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이다. ‘한국의 사찰’은 이 기본적인 기준에다 곳곳으로 격리되어있는 일곱 사찰의 문화적 공통성을 입증해내는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명칭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바꾸어 2018년 세계유산으로 등재에 성공하였다.
‘한국의 서원’ 역시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다 전국에 뚝뚝 떨어져 있는 아홉 서원의 문화적 공통성 입증에 어려움이 있어 예비 심사 반려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이에 본 심사를 자진 철회하여 재신청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 시켰다.
이들 두 세계유산의 영어식 명칭을 살펴보면, 산으로 쫓겨 들어가 오히려 독특한 형태를 이룬 한국의 사찰,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성현을 경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한국식 유학 교육원, 뭐 그런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억불정책이 오히려 차별화된 사찰 변화를 유도하여 세계유산 등재에 유리하게 되었고, 서원철폐를 통해 서원 난립을 간추렸던 것이 오히려 세계유산 등재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다는 분석이다.
불교의 ‘사찰’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도시 시가지에 소재하면서 승려들이 출퇴근하는 방식의 인도 사찰 형태에 비해, 한국은 특유의 선종 문화와 조선조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들이 대부분 전국의 명산 자락으로 옮겨 승가공동체 수행 공간을 형성하는 등 다른 나라의 불교사원과 차별화되었던 것이 세계유산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유학의 ‘서원’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의 서원은 지역 문화의 거점을 이루고 지역 성현들을 배향하는 곳으로 발전하면서 과거시험 준비에만 그친 중국의 서원과 차별화되었다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에 유리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건국 초부터 적극적인 숭불 정책을 편다. 이를 숭불호법(崇佛護法)이라고 한다. 이후 역대 국왕들도 자신의 원찰에 승려가 1,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사찰을 만들곤 했다. 이리하여 총인구 400만, 토지 총 60만 결(結)로 추산되는 고려국에 사찰이 소지한 토지 20만여 결과 노비 10만여 명, 승려 15만여 명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렇게 불교는 천여 년 이상 국교의 위치에서 정교 유착의 골 또한 깊었다. 특히, 궁예나 견훤은 자신을 미륵과 동일시했다. 이런 폐단 때문에 조선은 불교 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필수 요소가 되었다. 그리하여 구 왕조와 결별할 목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게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은 불교 배척과 유교보호의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은 각급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쳐 성리학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반면, 조선 태종은 전국에 242개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을 폐지했다. 세종대에는 총 36개소만 인정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리하여 조선조 사찰은 차차 산중으로 밀려나면서 소위 한국만의 독특한 산사 형태로 남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조 유림세력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서원이, 자기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고려 말 불교의 모습과 똑같아졌다는 점이다. 조선조에는 유교 중심 정책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생겨났다. 이러한 서원은 일종의 특권이 되어 전지(田地)와 노비를 점유하고, 면세·면역의 특전을 향유하면서 당론의 소굴이 되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전국의 1,000여 서원 중 47곳만을 남기고 죄다 훼철하였다. 이것이 소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이다. 한때 10,000여 개소를 훌쩍 넘겼던 고려조 사찰이 조선조에 와서 36개소로까지 정리되어 버린 사찰철폐령(寺刹撤廢令) 그것과 너무도 흡사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부석사의 세계유산 등재는 오는 6월 30일로 6주년이 되고, 소수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는 오는 7월 6일로 5주년을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