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竹嶺)의 처음 이름은 죽지령(竹旨嶺)이었다. 신라 아달라왕 5(서기 158)년 죽죽(竹竹)에 의해 ‘죽지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척된 이래 죽령은 근 2000년에 걸쳐 숱한 역사의 희비 쌍곡선을 만들어냈다. 그처럼 유구한 역사의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고갯길도 그리 흔치 않다.
죽령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으로서 삼국의 군사가 불꽃을 튀기던 격전장이기도 했다. 특히 신라 진흥왕 12년에는 거칠부 등 나제연합군이 죽령 이북 고을을 탈취함에 맞서 고구려 온달 장군은 ‘빼앗긴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사 항전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 곳이 또한 죽령 인근이었다.
죽령 고갯길은 오랜 역사 동안 민족 문명의 통로였다. 기쁜 소식, 슬픈 소식 등 크고 작은 소식들이 모두 죽령을 통해 날아들었다. 죽령은 이 지역의 신명이요, 문명이요, 운명이었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이었던 호국불교가 죽령을 넘나들면서 부석사에다 원을 그렸고,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정신도 죽령을 넘나들면서 소수서원을 그 중심지로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5년에 죽령 길이 열렸다”는 기록이 보이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 길을 개척하다가 지쳐서 순사(殉死)했다”는 비보마저 같이 실려있는 죽령 길이다.
후일 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왕건도 죽령을 넘었고, 나라를 바치러 개경으로 들어간 신라 경순왕의 눈물도 죽령에 흥건히 고여 있다. 삼국 전쟁이 끝나면 조용할 줄 알았던 죽령에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 23,000명이 죽령을 넘었다’는 기록도 실려있다. 한 말에 와서도 우리 의병이 일본 정규군을 맞아 죽령 일대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던 곳이 또한, 죽령전적지이다.
죽령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다. 예로부터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영남 3대 관문으로,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을 왕래하기 위해 이 고갯길을 올랐다.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선비, 봇짐과 행상 차림의 보부상, 부임을 위해 관리들이 오가는가 하면, 퇴직하는 퇴계의 귀향길 또한 죽령 길이었다. 그러니만큼 죽령에 얽힌 옛이야기들도 즐비하다.
노파의 재치로 산적을 소탕했다는 ‘다자구할머니’의 전설,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죽지랑의 탄생 설화, 전사한 온달 장군의 운구와 평강공주 이야기, 잔운대와 촉령대에서 퇴계와 온계 형제의 별리, 이현보를 마중하는 주세붕 군수, 36개 젖꼭지 중 한 개를 떼 낸 상원사 동종이야기들이 죽령 옛길 바닥에 빼곡이 놓여있다.
죽령은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심술궂게 갈라놓는 큰 길목이어서 ‘대재’라고도 부른다. 소백산 봉우리로 치자면 제2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의 잘록한 해발 696m의 높은 고갯길이다. 해발 700m 고지가 인체에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신작로를 개설한다고 야단스럽게 잿마루를 긁어내지만 않았어도 이 요건이 충분했다. 그러니 지금은 죽령 신작로보다 4~5m쯤 더 높은 동편 언덕배기가 이른바 ‘해피700’ 고지가 되는 셈이다. 죽죽의 사당(祠堂)터로 추측되는 곳이다. 이곳은 1991년부터 「죽령장승제」가 개최되면서 「죽령장승공원」이 조성되었다.
태초에 길은 없었다. 누군가 처음 길을 열어 발걸음이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삶과 역사도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현장이 죽령이다. 일반적으로 옛길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보통이나 죽령 길은 처음 길을 개척한 사람과 그 시기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이처럼 유서 깊은 죽령 마루에서 “죽령 길을 개척하다 죽은 ‘죽죽’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 고갯마루에 있었다”라고 기록된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올해에도 길 개척 1866주년 「죽죽제의(竹竹祭儀)」가 5월 25일(토) 11:00 죽령 마루에서 의미 있게 개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