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들어서 대대적인 교육개혁이 이루어졌다. 고교 평준화, 교원 정년 단축, 열린 교육 등 교육계에 세찬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시간이 지나면 나름대로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당시를 생각해 보면 교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뭐든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간다.’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교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졸지에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때 필자는 ‘선생인지 생선인지’라는 제목의 시를 잡지에 기고하면서 교육개혁을 비판했던 적이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아/ 아침 일곱 시에 출근하여 밤 열한 시 훨씬 넘어 퇴근하면서/ 십여 년이 흘렀다./ 어두운 운동장 가운데 서서/ 그래도 나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사람을 기르고 생명을 사랑하는 선생이라고 자위하며/ 도시락 가방을 들고 집으로 갔었다./ 식구들이 잠든 집안으로/ 혹시 들키지 않을까 도적처럼 들어가/ 아이들 방문을 살그머니 열면/ 벌써 사흘째 아빠를 보지 못한 둘째가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시를 이어갔다. “선생인지 생선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노동자니 스승이니 한참을 떠들 때도/ 참 부끄러운 마음에 한마디 말도 못하고/ 걷는 이 길이 진리는 아닐지라도/ 나는 너희들의 생명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며/ 이 땅에서 공부 아니면 무엇으로 출세하냐며/ 스스로 부끄러워 어깨를 숙이며/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가르쳤다.” 그때 이렇게 가르쳤던 선생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생산성이 없다고 했으니 많은 교사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세상도 변했고 교육 환경도 변했다. 학생들도 변했고 교사들도 변했다. 당시에 복도 창문까지 헐었던 열린 교육이 실패하고 새로운 수업 방식이 수도 없이 명멸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그에 따라 학교와 수업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근래에 와서 학부모의 영향력도 여느 때와 다르게 커져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교육 활동 중심에는 결국 학생과 교사가 있다.
요즘 들어 교사는 개혁의 대상은 아니지만 피곤하기는 그때보다 오히려 더하다. 분노하기에 앞서서 교사들은 지쳐 있다. 그렇다고 그 옛날처럼 제왕적인 교권을 추억하지도 않는다. 그냥 차분한 마음으로 잘 가르치고 싶을 뿐인데도 교육적인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학교 바깥에 있는 분들은 요즘 학교가 큰일이라면서 아이들은 맞으면서 커야지 그냥 오냐오냐 하니까 세상이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하지만 이제 그런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선생님들은 예나 지금이나 학생을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선생을 시장 어물전에 나온 생선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그냥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다. 아무리 학생들이 속을 썩여도 결국은 학생들이 가장 귀한 보배이며 미래의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참고 또 참으면서 가르치고 있다.
교권이 척박한 이 땅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모든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낸다. 플랭클린의 말이다. “신은 가끔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지곤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어떤 사람은 그 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돌들로 주춧돌을 삼아 집을 짓는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들이 바로 신이 던진 돌멩이를 발로 차지 않고 주춧돌을 삼아 미래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면 교사 앞에는 축구공이나 농구공처럼 예측 가능한 공이 날아오지 않고 럭비공처럼 예상치 못한 공이 갑자기 날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사들은 늘 마음이 불안불안하다. 교사의 휴대폰을 차단하여 저녁에 학생이나 학부모의 전화를 받지 않도록 한다고 하지만 막상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걱정과 불안감으로 지금도 학생을 걱정하는 교사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줄 수가 있는지 정말 되짚어봐야 할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