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83] 풍기 용천사(龍泉寺)와 고려 태조(왕건)의 영정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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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83] 풍기 용천사(龍泉寺)와 고려 태조(왕건)의 영정

2024. 05. 09 by 영주시민신문

전국 십승지 중에서도 제1승지라는 풍기 금계리 안골 용천동에는 용천사(龍泉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 조그만 사찰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진영(眞影)이 봉안되던 때가 있었다. 왜구의 출몰이 한창 성가시던 고려말이었다. 피난처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새 봉안처가 마련될 때까지 약 200년 동안이나 이곳에 안장되어 있었다.

역사 이후 왜구의 출몰이 변변한 날이 몇 날이나 있었을까만,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가 경상도, 전라도 등 삼남지역뿐만 아니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민가는 물론 사찰의 재보까지 털어갔다’고 『고려사절요』에 적혀 있다. 공민왕 6년에는 ‘승천부의 흥천사에 왜구가 쳐들어와 충선왕과 왕비의 영정(影幀)을 들고 갔다’고 되어 있고, 공민왕 14년에도 ‘왜적이 창릉에 침입해서 태조(왕건)의 아버지 초상화를 훔쳐 갔다’고 적혀 있다.

이런 와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화상을 지키는 일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고려 우왕 6년(1380) ‘여은현(如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던 태조(왕건)의 진영을 순흥 용천사로 옮겼다’라는 기록이『고려사』에 남아 있다. 여은현은 현재 문경시 가은읍이고, 양산사는 희양산 봉암사를 말한다. 또 「풍기군지」에는 ‘군수 임제광(林霽光)이 용천사에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했으나 얼마 아니하여 화재를 만났는데 다행히 영정은 온전했다’고 당시 상황을 적고 있다.

이때 풍기 군수이던 퇴계 이황이 용천사에 들러 태조의 화상을 참배한 일이 있었다. 화재 이후 영정은 작은 궤 속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는데, 승려들이 받들 줄 몰라서 그것을 목침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퇴계 선생이 하늘이 낸 사람을 이처럼 모독할 수 있느냐며, 용천사 승려들에게 따로 집 한 칸 마련하여 태조 영정을 봉안하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완공을 확인하지 못한 채 군수직을 사퇴하고는 고향으로 떠났다.

이일이 조정에 와전되어 퇴계가 크게 곤혹 치르는 일이 되었다고 한다. ‘사당을 지어 진영을 봉안하라’고 한 것을 조정에서는 고려 태조에게 제사 지내도록 지시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난 왕조의 제사는 흥멸계절(興滅繼絶, 새로운 왕조는 계승하나 사라진 왕조는 멸절한다)의 원칙에 따라야 함에도 일개 군수가 이를 어기고 제멋대로 제사(祭祀)를 지시했으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라면서 퇴계를 탄핵하려 했다는 뒷이야기이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만들면서 태조 왕건의 영정은 풍기 용천사에서 중년을 잘 보내고 난 뒤 연천의 숭의전으로 옮겨졌다. 경기도 연천의 숭의전은 태조 왕건을 배향(配享)하는 종묘(사당)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 9년(1576) 5월 15일 ‘풍기 용천사에 소장된 고려 태조의 화상(畫像)을 마전현(麻田縣, 연천) 숭의전(崇義殿)으로 옮겼다’고 했다. 나아가 『오례의』에는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의장(儀仗)을 갖추고 풍기 용천사에 있던 고려 태조의 화상을 이곳(연천)으로 옮겨오게 했으며, 1605년에는 경기감사의 계청(啓請)으로 숭의전을 중수한 뒤에 향과 축문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원래 숭의전에는 앙암사(仰巖寺)라는 태조 왕건의 원당 사찰이 있었다.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철원으로 가면서 자주 들르던 곳이라 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곳을 고려 태조 왕건을 모시는 종묘(사당)로 만들어 전조를 예우하였다. 고려왕조를 추모하는 유일한 문묘(文廟)라고 한다. 지금은 사찰 흔적이 없어지고 대신 사당이 들어섰지만, 한 건물에는 앙암재(仰巖齋)라는 사찰 명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숭의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태조(이성계)는 즉위한 뒤 왕씨의 태묘(太廟, 종묘)를 헐어버리고 신주(神主)는 배에 실어 임진강에 띄워버렸는데 이 배가 스스로 물살을 거슬러 마전현 강기슭에 있는 절 앞에 멈추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태조는 신주를 그 절에 모시라고 영을 내렸다. 그 절을 앙암사라고 한다.’

현재, 숭의전에서는 고려 태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개성왕씨 주관으로 춘추로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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