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紹修書院)의 본디 이름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주희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유래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이곳의 지명은 ‘백운동’이었다.
소수서원 아랫마을에 백운동경로당이 있고, 마을 사람들은 그 앞 은행나무를 백운동은행나무라고 부른다. 이곳 백운동에 1542년(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고자 사묘(祠廟)인 회헌사당(晦軒祠堂)을 세웠고, 이듬해 1543년 백운동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뒤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건의로 「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소수서원은 제향(祭享), 강학(講學), 유식(遊息)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담장 안쪽 서편에 제향 공간인 문성공묘·전사청(典祀廳)이 있고, 그 동편으로 강학을 위한 강학당(講學堂)·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학구재(學求齋)·지락재(至樂齋)가 격식을 갖춰 배열되어 있다.
제향 공간이 서편에 배치된 것은 서쪽을 중시하는 전통문화와 뒷산에 의지하려는 풍수지리가 함께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동학서묘(東學西廟)의 특이한 구조가 된 셈이다. 그리고 담장 밖으로는 두 영역을 보좌하는 유식(遊息) 공간이 자리하는데, 경렴정(景濂亭)과 취한대(翠寒臺) 등이 그것이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강학당 건물은 정면을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동쪽으로 정문이 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보면 이곳도 평지 서원의 전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가 되는 셈이다. 지금은 주차장 입구에서 강학당 측면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남쪽에 지도문(志道門)을 설치하였다. 지도(志道)는 도학(道學, 성리학)을 늘 마음에 두고 출입하라는 신호이다.
제향 영역의 중심인 문성공묘는 이곳에 배향된 안향의 시호가 ‘문성(文成)’이기 때문이다. 보통 제향을 위한 건물을 사당(祠堂)이라고 부르는데, 소수서원에는 주 배향 인물이 성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안향(安珦) 선생이기에 격을 높혀 문묘(文廟)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문성공묘(文成公廟)」이다.
강학 영역의 중심인 강학당은 정면 좌측 3칸은 마루를, 우측 1칸은 방을 배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旣廢之學 紹而修之(기폐지학 소이수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에서 취한 것이다. 강학당 뒤편으로는 직방재-일신재-학구재-지락재가 차례로 도열했는데, 지락재(至樂齋)는 원생들의 거처(居處) 겸 배움터이다.
지락은 『明心寶鑑(명심보감)』 훈자편(訓子篇) 「至樂 莫如讀書 至要 莫如敎子(지락막여독서 지요막여교자,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고, 진실로 중요한 건 자식을 가르치는 것 이상이 없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공부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 앞 학구재(學求齋)도 원생들의 숙소 겸 공부방이다. ‘학구(學求)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갈구한다’는 뜻이다. 지락재와 연결되어 ㄱ자 모양을 이룬다.
강학당으로 한 발 더 다가서는 일신재(日新齋)는 『大學(대학)』의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지라)」에서 인용했고, 직방재(直方齋)는 『周易(주역)』의「敬以直內 義以方外(경이직내 의이방외, 깨어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서 행동을 가지런히 한다)가 그 출처이다.
학문은 독서에서 비롯되므로 지락재가 맨 아래쪽에 있고, 독서를 통해 성현과 같이 되기를 구가하므로 학구재가 그 서쪽에 있으며, 학문으로 성현을 추구하매 날마다 새롭게 하므로 일신재가 그 서쪽에 있다.
또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고서 경(敬)으로 내면을, 의(義)로 외면을 바르게 행해야 하므로 직방재가 맨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 뒤에야 명륜(明倫)으로 천하에 교화를 밝힐 수 있기에 강학당이 직방재 앞에 우뚝 서는 이치이다. 하학상달(下學上達)의 단계를 표현한 건물 배치이다.
담장 밖의 유식 공간인 경렴정은 서원의 학문과 냇가의 자연을 이어주는 연결지점이다. 풍류와 심신 수양의 거점 역할을 한다. ‘경렴’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를 경모(景慕)한다는 뜻이고, 건너다보이는 취한대는 「송취한계(松翠寒溪,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라는 시 구절에서 따왔다.
이런 일련의 과학적 건물 배치가 취한(翠寒) 인재 4,000여 명을 배출시킨 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