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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11] 봄날, 실버들에 배우다

2024. 04. 04 by 영주시민신문

우리나라의 봄은 버드나무에서 온다. 강변을 거닐다 보면 버드나무는 자태를 꾸미지 않고 가녀린 그대로 연초록색 얼굴을 살짝 내민다. 벚꽃, 영산홍, 개나리와 같이 봄꽃이 화려한 만개로 봄을 알릴 때 버드나무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봄을 알린다. 아마 봄의 전령사 중에서는 가장 얌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예로부터 버드나무를 아름다운 여인에 빗대어 쓴 글이 많이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버드나무 중에서도 실버들이 가장 버드나무답다. 실버들은 실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진 버들이라는 뜻에서 수양버들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가녀린 몸을 늘어뜨린 품이 치맛자락이 허리춤에서 흐드러지게 내려간 자태 같기도 하다. 실버들 잎은 연초록이어야지 녹음으로 짙어지면 별 재미가 없다. 이른 봄에 연두색 잎새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 때가 실버들다운 모양이다. 그래서 실버들 옆에는 물이 콸콸 흐르면 안 된다. 그냥 졸졸 흘러야 실버들 소리가 들린다.

실버들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하여 몸을 낮춘다.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과는 정반대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높은 곳에 가고 싶어 한다. 권력이 있고 명예가 있으며 돈이 많은 곳을 좋아한다. 학벌도 높은 것이 좋다. 직위나 직책도 높아야 하고,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가장 높고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버들은 한적한 강가에서 낮은 곳으로 고개를 숙이고 낮은 곳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연록색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실버들은 가벼운 봄바람에도 흔들리기도 하지만 쉽게 부러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강하고 굳건해도 자유가 없이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란 흔들릴 수도 있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으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바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바람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다가도 밤이 되고 아침이 되면 다시 자기 자리를 잡고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를 하는 넉넉함이 있다.

그렇게 보면 꽃을 피워 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한 시냇가에서 다가오는 봄햇살에 살짝 몸을 보여주고 부끄러워 연초록으로 숨는 자태가 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실버들은 가르치고 있다. 부끄러움이 떳떳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연초록이 진하디 진한 빨강이나 노랑보다도 강렬할 수 있음을, 화려한 봄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은자(隱者)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 원망을 품고 숨어서 살아가거나 세상에 관심이 없어서 세상과 연을 끊고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버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여린 몸으로 말한다. 어차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람이 부는 광야와 같으므로 오히려 바람을 맞으면서 바람에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사람다운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자의 삶을 부정하면서 자기 입장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실버들 하니 조선 중기의 시조 한 편이 떠오른다. 문인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다. 최경창이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 둘은 깊은 사랑에 빠졌는데 오래지 않아 최경창은 임기가 되어 한양으로 떠난다. 함께 떠날 수 없었던 홍랑은 떠나는 최경창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주면서 시조 한 수를 건넨다. 최경창이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시묘살이를 자처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묘를 지켰다고 하니 그 사랑이 대단하다.

“산 버들 골라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라도 나거든 날 본 듯 여기소서” 산버들로 상징화된 홍랑의 사랑은 연약한 것 같지만 어떤 사랑보다도 강하다. 시냇가에서 꺾은 버드나무 가지는 곧 죽을 수도 있으나 밤비와 같은 영혼의 촉촉함이 내리기만 하면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새잎이 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참으로 고집스러운 시대에 자유를 추구했던 한 영혼의 헌신을 만날 수 있다. 봄날, 시냇가에 나가면 예쁜 실버들의 소근거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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