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순흥 선비촌 광장과 무섬 모래사장에서 달집태우기가 있었다.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하여 무척 풍성하게 치러진 행사였다. 사람들은 달집이 타는 것을 보면서 복을 빌기도 하고 액운을 쫓기도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올해는 날이 좋지 않아서 밝은 보름달은 보지 못했지만 다들 마음속에 하나씩 커다란 보름달을 안고 올 한해도 삶이 풍요로웠으면 하는 소원을 빌어 보는 것이었다.
유년 시절을 생각해 보면 정월 대보름은 어쩌면 설날보다 더 즐거운 날이었다. 설날에는 비록 얼마 되지 않으나 세뱃돈을 받고 음식을 배가 터지라고 먹을 수 있어서 좋은 날이었다. 이에 비해 정월 대보름날은 찰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심이 가까우면 마을 풍물패가 집에 찾아와서 지신밟기를 하는데, 집안에 온갖 복이란 복을 다 빌어주고 떠나가면 모든 일이 잘될 것만 같은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오후가 되면 마을 청년들을 따라 마을 앞산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도인봉에 올라갔다. 어른이 된 지금 보면 별로 높지 않아서 단숨에 올라갈 수 있는 높이지만 어린 마음에 도인봉이 얼마나 높은지 우리나라에서 소백산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달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근처 생솔가지를 잘라서 차곡차곡 쌓기 시작하면 어느덧 어른 키보다 갑절은 더 높은 달집이 만들어진다.
달집을 다 만들고 난 다음 우리는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내리막을 쏜살같이 내려온다. 곧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전에 쥐불놀이 준비를 해야 했다. 이미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았다. 철삿줄로 깡통 양쪽을 매어 돌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해가 지고 깡통에 관솔을 넣고 불을 붙였다. 바싹 마른 관솔가지가 활활 타오르면 우리들은 깡통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쥐불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동녘엔 보름달이 오르는지 불그스레하게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쥐불놀이를 하면 당시 정말 골치 아팠던 쥐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쥐는 논에는 물론이고 밤만 되면 천장에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겨울이 지나면 천장에 쥐 오줌 자국이 흥건하여 방안이 온통 뒤숭숭했다. 쥐불놀이를 하면 그런 쥐가 사라진다니 깡통을 힘을 다해 돌렸다. 우리는 쥐불놀이를 망우리라고 했다. 아마 망월(望月)이 망우리라는 말로 변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보름달을 기다렸다.
쥐불놀이가 마칠 때쯤 도인봉 위에 달집이 타기 시작했다. 어려서 저녁에는 산에 오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여린 불빛과 함께 진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더니 조금 후 생솔가지에 불이 붙으면서 불꽃이 하늘을 찌른다. 달집이 활활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멀리 단산과 새네, 동촌 방향으로도 봉화처럼 달집이 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산봉우리에 불을 놓다니 화재 위험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그때는 있었다.
달집이 훨훨 타기 시작할 때쯤 훤한 보름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른다. 어떤 일그러짐도 없는, 풍요와 충만과 완전함의 상징인 보름달이 하늘로 오르면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쥐불놀이의 흥성스러움과 달집태우기의 신비스러움은 보름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월 대보름날의 주인공은 쥐불놀이도, 달집태우기도 아닌, 보름달이었다. 우리는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쌀밥 좀 배 터지도록 먹게 해 달라고, 올해 농사가 잘돼서 울 어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게 해달라고, 동생하고 싸우지 않게 해 달라고 소박하디 소박한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정월 대보름날의 하루가 지나갔다. 지신밟기를 시작으로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보름달 맞이하기로 이어진 하루는 글자 그대로 풍요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날 저녁에는 불놀이를 많이 한 탓에 이불에 오줌 지도를 만든 친구도 있을 것이었다. 이제 겨울의 끝자락에서 곧 봄이 올 것이다. 불에 그을리고 탄 자리마다 풀이 자라고 들꽃이 필 것이다. 그러면 불의 소멸 다음에 물의 생명이 지배하는 봄이 펼쳐질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