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문화파출소(이하 영파)는 구 영주경찰서 중앙파출소가 있었던 자리에 있다.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영주문화의 귀중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건물을 헐지 않고 잘 보존하여 의미 있는 장소로 만든 뜻깊은 공간이다. 경북지역 파출소의 옛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졌던 장소에서 영주문화를 지키는 장소로 변신한 의미 있는 곳이기에,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잘 보존한 분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영파는 영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영파 옆에 영주관아가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일본군이 영주관아를 점령하였고, 일본군 수비대가 관아를 차지했다. 이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이 되면서 순흥, 풍기, 영천군을 합쳐 영주군이 된다. 지금의 영파 자리에 우편소가 들어오고, 영파 옆 영주1동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경찰서가 세워지고 수비대 터에는 서부소학교와 고등소학교, 학교의 동쪽에 군청이, 군청 앞에 등기소와 헌병대가 들어선다. 이렇게 영파는 영주 역사의 현장에 늘 있었다.
영파 옆에는 영주시 도로원표가 있다. 서울, 대구, 부산, 강릉까지의 거리가 새겨져 있고, 도로원표 옆에는 옛 이정표(里程標)로 동서남북에 위치한 내성, 춘양, 풍기, 단양, 예천, 안동, 부석, 순흥까지의 거리가 새겨져 있다. 다시 말해서 영파가 위치한 곳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는 길이 출발하는 시작점이다. 여기를 기점으로 봉화통로, 풍기통로, 안동통로가 시작되기도 하니 길 문화로 봐서도 뜻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길 문화의 시작과 함께 영파는 영주문화의 출발점이다.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첫머리에 영파가 있다. 길을 따라 영주제일교회, 풍국정미소, 영광이발소, 이석간 고택, 철도관사를 묶어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가 되었다. 아름다운 관사골의 이야기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영파 앞으로 광복로와 영주로를 따라 이어지는 후생시장과 영주근대역사체험관, 그 영주역 모습을 간직한 중앙시장, 구성산성과 동구대 주변의 많은 유산들을 만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영파는 영주문화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영주 여행을 하고자 하는 많은 분이 영파로 문의 전화를 한다. 영주 관광을 하고 싶은 데 어떤 곳을 어떻게 찾아가면 좋겠냐고 직접 찾아오는 분들도 꽤 있다. 어떤 분들은 길을 묻기도 하고 심지어 경찰서 파출소인 줄 알고 지갑을 주워서 가져오는 분이 있는가 하면 운전면허증 갱신을 위해 찾아오는 분들도 있어 심심하지는 않다. 사랑방에서는 재미나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영파는 도시재생에서 떼놓으래야 떼놓을 수가 없다. 영파의 탄생부터가 도시재생과 관계가 있을뿐더러 영파에서부터 관사골이나 후생시장, 중앙시장의 도시재생 사업이 점과 선으로 열결돼 나갔던 것이다. 어쩌면 구성산성 불바위 밑에 있는 할매묵공장과 할매묵집까지 도시재생이 이어지는 출발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영파에는 도시재생에 대한 안내를 받고자 찾아오는 분들이 많이 있다. 영파는 영주 도시재생의 상징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영파에 있으면 아쉬운 점도 많다. 무엇보다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를 보면 스산한 느낌도 난다. 이 거리는 기존의 ‘점(點) 단위 개별 문화재 관리’에서 ‘선면(線面) 단위 등록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처음에 근대역사문화거리가 꿈꾼 것은 문화재 지정과 함께 경주의 황리단길 같은 풍성한 길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전통문화가 숨 쉬면서도 먹거리도 풍부하고 쉴 수도 있으며 즐길 수도 있는 길을 꿈꾸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영주근대역사문화거리와 후생시장,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영주문화의 길은 어느 길에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이야기가 있고 콘텐츠가 있다. 이야기와 콘텐츠는 결코 고정되어 죽어 있는 무정물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문화적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재생되는 힘이 있다. 단 한 번의 도시재생에 머물러서는 새로운 이야기나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없다. 포기하지 않고 새로움을 덧입히는 문화적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