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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6] 정도전의 막역지우 원천석(元天錫)

2024. 02. 01 by 영주시민신문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이 시조(時調)를 기억할 것이다. 정몽주와 더불어 절개의 선비로 손꼽는 고려 말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작품이다. 원천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동기에 절개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출사하지는 않았다. 고려가 망한 뒤엔 치악산에 은거해 다시 나오지 않았다.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어서 거듭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심지어 태종이 친히 치악산으로 찾아왔지만, 교묘하게 물리쳤다. 그러나 그의 산중 살림은 매우 궁핍하여 거의 초근목피로 연명했다고 한다.

처자마저 먼저 세상을 뜨는 불행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바깥의 정세가 들려오면 자신의 목소리를 시로 당당히 표현했다. 미수 허목은 그를 ‘백대의 스승’이라 칭송했고, 퇴계는 ‘여말선초를 가장 올곧게 산 선비’라 평했다.

그의 무덤은 원주시 행구동 야산 자락에 있다. 소탈한 봉분이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흔한 망주석이나 문인석 같은 치장도 없다. 그의 유지에 따른 것이라 한다. 원천석의 묏자리를 잡은 이는 당대 최고의 풍수가 무학대사였다. 요즈음 풍수가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도로 이름난 명당이다. 이른바 ‘벌 허리 형국’, 즉 「봉요혈」인데 벌떼 퍼지듯 자손이 많이 생기는 터라고 한다.

원천석은 시절이 수상해지자 일찌감치 치악산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부모를 봉양하며, 무욕의 산중살이로 자신을 구하고 세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산중 삶 속에서 1144수라는 수많은 절창의 시를 썼으며, 애민의 시편들과 우국의 시가들을 쏟아냈다. 이런 독특하고 비범한 은둔 행장의 집결지가 바로 치악산이었다.

원천석은 정도전과 동갑내기다. 정도전이 몇 번에 걸쳐 치악산을 찾을 정도로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막역지우였다. 원천석의 집을 찾았을 때 지은 정도전의 시가 남아 있다.

​<동갑내기 원군이 원주에 숨었으니/ 다니는 길 험하고 산골도 깊어라/ 멀리서 친구를 찾아와 말을 멈추니/ 겨울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그리던 나머지라 흔연히 웃고 나서/ 통술 앞에 다시 마음을 털어내니/ 나는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네/ 세상의 영욕을 이미 잊었네>

정담과 술, 그리고 춤까지이니 치악산 골짜기가 거대한 노래방이 되었다. 이때가 한창 발랄한 서른 살 때였다. 거나한 주흥 속에 우의를 언약했지만, 고려가 침몰하면서 두 사람은 확연하게 엇갈리게 된다.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최고 공신이 되었지만, 원천석은 고려의 부음을 애도하며 치악산에 은거했으니까.

그러나 원천석이 새 나라 조선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의 기수인 정도전을 시로써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벗은 죽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이방원에 의해서.

​​기록에 따르면, 원천석은 치악산 비로봉에 올라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한다. 망국 고려를 추모하고 신생 조선의 순항을 빌었다. 그는 정몽주처럼 고려와 함께 몰락하지도 않았고, 정도전처럼 조선의 개국에 투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개국 자체를 천운이라 긍정하는 한편, 건국 주체들의 패덕에 대해서는 거센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국기와 국운의 바른 지향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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