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5]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정신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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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5]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정신

2024. 01. 18 by 영주시민신문

일본 사무라이[武士道]들의 수양서 『ハダカデバネズミ(葉隱聞書)』에 이런 가슴 섬뜩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가난한 홀아비 무사(武士)가 떡 장수네 집 이웃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떡집에서 놀고 있던 무사의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떡 장수는 무사에게 떡값을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무사는 떡 장수에게 “내 아들은 굶어 죽을지언정 남의 떡을 훔쳐 먹을 아이가 아니오”하고 단호하게 말했으나, 그래도 떡장수는 “무슨 소리요,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 먹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데…”

하면서 빨리 떡값을 내놓으라고 몰아세우자, 무사는 순간적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다짜고짜로 아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아들이 떡을 먹지 않았음을 백일하에 입증해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떡 장수를 잔뜩 노려보던 무사는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 그에게 달려들어 단칼에 목을 날려버렸다. 떡 장수의 목이 땅바닥에 굴러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무사는 정좌하고 앉아 두 사람을 죽인 그 칼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북 그어버렸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윤상(尹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가슴 따끈한 이야기가 올라 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어느 집 행랑에 묵게 되었다. 저녁 요기를 마친 나그네는 무심코 밖을 내다보았다. 주인집 사내아이가 구슬을 갖고 놀다가 떨어뜨렸다. 마침 지켜보던 거위가 득달같이 달려와 그 구슬을 냉큼 삼켜버렸다. 잠시 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가보(家寶)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귀중한 구슬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집안을 구석구석 샅샅이 다 뒤져도 구슬이 나타나지 않자 주인은 식객으로 묵고 있는 나그네에게 도둑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나그네는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결국, 나그네는 결박당해 사랑채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날이 밝으면 관가로 끌고 갈 참이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하룻밤 동안을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난 나그네는 다음날 관가로 끌려가지 직전에 주인에게 거위가 눈 똥을 잘 살펴보자고 했다. 잃었던 구슬은 거위의 똥 속에서 나왔다.

주인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는 얘기를 않고 밤새 고생을 했소이까?”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젯밤에 그 사실을 밝혔더라면 당신은 그 자리에서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게 아니오. 내가 하룻밤 고생한 덕에 거위는 목숨을 건졌고, 당신은 구슬을 찾게 되지 않았소이까?”>

딱히 이 한 가지씩의 이야기가 무사도와 선비정신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미묘한 차이가 일본의 사무라이와 한국의 선비정신을 짐작할 수 있는 한 지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일본 무사 이야기는 너무 가슴 서늘하지만, 그들만의 세계에서 통하는 특별한 무사도 정신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무사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명예에 관한 것은 특히나 중대한 일로 사무라이정신이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명예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세뇌시킨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부모보다도 주군(主君)에 대한 충성으로 목숨을 바치게 된다는 귀결이 된다.

이에 비해, 조선의 선비정신은 한 템포 늘어진 여유가 감칠만한 매력을 선사한다. 한순간 돌려막는 기지로 당 사건을 해결하고, 나아가 미물의 생명까지 아끼는 수준 높은 가치로 승화되어 묘미를 주는 것이다.

초등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거위와 구슬’ 일화는 조선 초기 대학자 별동(別洞) 윤상(尹祥)의 실화라고 한다. 윤상은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출신으로 일찍이 예천의 송정(松亭) 조용(趙庸)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후에 정몽주·권근의 문하에서 더욱 학문을 다듬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예천군의 말단 향리로 출발하여 영주 군수, 대구 수령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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