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말이 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바람이 키웠다고 한다. 바람에 꺾였다고 안타까워하는 정치인도 있다. 다시 바람 부는 광야로 나가겠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뛰쳐나간 사람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바람과 떨어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람으로 이루어진 팔할 다음에 있을 무지개를 보고 달려가고 있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는 스물세 살에 쓴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서정주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머슴은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이르던 말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흙수저도 못 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흙으로 바람벽 하여 겨울만 되면 방안에 한기(寒氣)가 도는 집에다가 손톱에 때가 껴 까만, 가난에 찌든 모습이다. 그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자기를 키운 게 팔할이 바람이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고 천치라고도 했다. 죄인이어서 사람들에게 부끄러웠고, 천치라서 무지한 자기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미당이 죄인인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화사(花蛇) 즉 꽃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과 뱀과 같이 악한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꽃과 뱀 사이에서, 정신과 육체 사이에서 사람은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미당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당은 「자화상」에서 자기의 삶과 가족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직설적으로 대뜸 고백하기도 하고 은유적인 표현을 빌려서 부드럽게 고백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투박하기도 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면서 자기가 스물세 해 동안 살아온 삶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시구가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귓전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고백으로 미당은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돌아보건대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미당의 어머니처럼 손톱에 때가 끼듯이 삶에 때가 묻을 수도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죄인과 같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고 천치와 같이 뼈아프게 후회스러운 일도 있을 수 있다. 새로운 지평을 열고 큰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진정성과 진실성을 잃어버렸을 때 문제는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대부분 사람은 자신을 키운 팔할이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그만의 독특한 이야기가 있다. 누구든지 눈물겨운 이야기쯤은 밤새도록 늘어놓아도 부족할 만큼은 있다. 소설을 써도 몇 권을 쓸 수 있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특히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야깃거리가 많다.
결국은 이야기에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솔직한 고백이 가능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정성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 들어가면 진실성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일수록 진실성이 있어야 공감을 얻을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공감하는 눈물은 솔직한 고백이 아니면 절대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악어의 눈물은 눈물이 아니라 악어의 하품이라고 한다. 결국은 눈물이 아닌 하품은 바로 공기 중에 흩어지게 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