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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00] 생명은 트렌드가 아니다

2024. 01. 11 by 영주시민신문

지인(知人)에게서 들은 얘기다. 방에 창문을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박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박새가 방에 들어왔으니 한바탕 박새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단다. 박새는 손에 잡히기라도 하듯이 유인하더니 창문을 빠져나갔다. 집 뜰에서도 꼭 ‘나 잡아봐라’ 하는 식으로 앉아 있더란다.

박새를 잡으려고 한바탕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나무 아래에 이르렀는데 새끼 한 마리가 새집에서 떨어져 땅에 쓰러져 있었다. 아, 이거였구나 생각하며 새끼를 새집에 올려놓으니 어미 새는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미 새는 새끼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새끼 좀 살려달라.’고 호소한 것이었다.

가끔 학교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수업하다 보면 새가 교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살려 주려고 교실 창문을 모두 열어놔도 당황한 새는 교실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면서 출구를 찾지 못해서 한참을 퍼덕인다. 그런데 그 박새는 새집에서 떨어진 새끼를 구하려고 스스로 창문으로 들어와 사람을 유인하는 것이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자기 새끼 앞에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가 보다. 생명과 사랑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2008년에 중국 쓰촨성(四川省)에서 지진이 일어났었다. 리히터 규모 8.0으로 사망자가 7만명 정도가 나온 대지진이었다. 그때 전 세계에 ‘위대한 모정(母情)’으로 보도되어 잘 알려진 기사가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모든 게 폐허가 된 지진 상황에서 온몸으로 건물을 지탱하며 숨져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콘크리트 더미에 덮였는데 등이 콘크리트를 받치고 무릎을 꿇어 찌그러진 모습으로 죽어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어머니의 양손과 무릎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땅에 대고 무너지는 콘크리트를 받치고 있었으며 어린 아기는 세상 모른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 옆에 놓인 엄마의 휴대전화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사랑스러운 내 아가, 네가 살게 된다면 이것만은 기억해다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나 생명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수없이 많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자식을 사랑했다.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어머니도 이렇게 자식을 사랑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이라도 베어줄 수 있는 분들이 아마 대부분일 것이다. 짐승도 제 새끼 사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숲에 들어가 보면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우는 새소리를 들어 모면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랑의 본질은 생명의 외경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생명이 없는 것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다. 돈이 아무리 좋아도 좋아할 뿐이지 사랑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명이 있어서 신선하고 생명이 있어서 뜨겁다. 생명이 자라나서 늠름하고 생명이 꿈틀거려서 신비로운 것이다. 생명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비롭게 느껴진다. 또한 생명에서 나오는 호흡은 그 무엇보다도 뜨겁다. 그래서 생명의 외경이라고 하여 경이롭기까지 하다.

얼마 전에 야당 대표를 벌건 대낮에 테러한 사건이 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유가 극단적인 이념이든지, 사회에 대한 불만이든지, 야만적인 일탈행위이든지 간에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생명의 존엄함에 반하는 이러한 행동은 그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짐승도 지키고 싶어 하는 생명을 어떻게 사람이, 그것도 백주대낮에 저지를 수가 있다는 말인지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생명보다 그 어떤 것도 먼저일 수 없다. 생명 앞에 이념이 놓아서는 안 된다. 생명 앞에 정치를 놓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생명 앞에 집착을 놓아서도 안 된다. 생명 앞에 편견을 놓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생명 앞에 물질을 놓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생명 앞에 놓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끔은 생명 앞에 사랑을 놓기도 하지만 그것마저도 늘 올바른 것은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랑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특히 생명은 자기 시대에 맞게 자기 방식대로 마음대로 해석하는 트렌드는 더더욱 아니다. 생명은 늘 그렇게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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