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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98] 고슴도치의 딜레마

2023. 12. 28 by 영주시민신문

2023년의 끝자락에 와 있다. 벌써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코로나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한 해도 훌쩍 가버렸다.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뭔가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기는 해도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코로나의 후유증인지 전쟁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나 살아가는 것도 꽤나 팍팍하다. 지난 일 년은 희망이 넘쳐서 꿈에 부풀었다기보다는 어떻게 삶을 풀어 나갈까 막연하게 걱정을 앞세우면서 살아왔던 한 해였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가장 어려웠던 것이 인간관계였다. 코로나로 집에 갇혀 있을 때는 오히려 편했다. 혼자서 뒹굴뒹굴 구르며 잘 놀면 그만이었다. 좀 외롭기는 했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만 알면 어려운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싸울 일도 없고 부딪힐 일도 없다. 안 보면 그만이고 안 만나면 그만이었다. 불편한 것이 있으면 메시지나 카톡으로 몇 자 적어 보내면 되고 답장은 안 하면 그만이었다. 만날 일이 별로 없다 보니 갈등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다가 거리 두기가 없어졌다. 코로나는 법으로 거리 두기를 시행했기에 거리를 두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법적으로 정당화되었다. 거리 두기가 끝나면서 이제 거리 두기는 우리의 선택으로 돌아왔다. 관계를 설정하고 적당한 거리를 생각하며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분명한 것은 이삼 년 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이야 변화에 익숙해서 변화가 자연스러웠으나 변화에 익숙지 않은 어른들도 옛날 어른들이 아니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이야기에서 비롯된 심리학 용어이다. 추운 겨울밤에 한 쌍의 고슴도치가 온기를 나누기 위해 다가갔다. 너무 가까이 가니 자신들의 몸에 있는 가시가 서로를 찔렀다. 아픔을 느낀 고슴도치들은 이내 떨어졌으나 추위를 견딜 수 없자 다시 모였고, 또다시 서로의 몸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고슴도치들은 가시가 없는 머리와 입을 맞댐으로 추위를 이긴다고 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란 말이 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때 월나라 왕은 문종과 범려라는 인재를 얻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했다. 월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범려는 문종에게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이 튀어나와 매의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을 하는 상이오. 이런 상을 한 사람은 불가근불가원 해야 하오. 만일 그대가 왕을 떠나지 않으면 왕은 장차 그대를 죽이고 말 것이오.” 범려의 말을 듣지 않은 문종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불가근불가원은 너무 가깝게도 말고 멀게도 말라는 뜻이다. 코로나 이후에도 사람들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살아가려고 한다. 인간관계의 가시에 찔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슴도치의 딜레마와 다를 것이 없다. 너무 멀어도 외롭고 너무 가까워서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인간관계를 경계하는 데서 나온 말이 오히려 바람직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학사 위에 석사가 있고 석사 위에 박사가 있고 박사 위에 밥사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밥을 잘 사는 사람이 배운 사람보다 더 낫다는 말이다. 고슴도치들이 몸에 가시가 있어 몸은 서로 가까이할 수 없으니 입을 가까이함으로써 추위를 이긴다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서로 만나 음식을 나누고 차를 함께 마시다 보면 인간관계의 따듯한 묘미를 느끼게 된다.

명년(明年)에는 많은 사람이 고슴도치의 딜레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불가근불가원에서 가졌던 거리 두기를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한다. 물론 우리의 삶의 양식이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겠으나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인 인정이나 배려는 다시 살려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학사, 석사, 박사 학위는 좀 멀찍이 넣어 두고 밥사 학위를 이웃 사람들에게 받아보자. 어쩌면 이런 모습이 진정한 의미에서 회복이 아닌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해 본다. 세상이 정신없이 변해가니 밥 먹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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