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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96] 지식의 저주

2023. 12. 14 by 영주시민신문

어릴 적 에피소드다. 사진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다. 사진관에 있으니 아무래도 카메라에 대해 전문 지식이 많았다. 문제는 이 친구를 만나기만 하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카메라 얘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카메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별 흥미도 없는 내게는 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도 그 친구가 알지 못하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국어를 전공했으니 이 친구에게 국어의 전문적인 내용을 말해야겠다 생각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을 본떠서 만들었고, 기역(ㄱ)은 설근폐후지형(舌根閉喉之形)으로 혀의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뜬 것으로 어쩌고저쩌고 마구 지껄였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나중에야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앞으로 카메라 얘기 안 할게.’ 하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고 한다. 지식의 저주는 1990년 스탠퍼드대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딴 엘리자베스 뉴턴의 ‘두드리는 자와 듣는 자(Tapper and Listener)’란 실험에서 유래됐다. 누구나 잘 아는 노래를 골라서 A그룹에 노래 제목을 알려주고 원하는 노래의 리듬에 맞춰 책상을 두드리도록 했다. 반면 B그룹에는 곡명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책상을 치는 소리만 듣고 노래 제목을 맞혀 보라는 실험이었다.

책상을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연주한 노래의 50퍼센트 이상은 맞힐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듣는 사람은 2.5퍼센트가량의 곡만 알아맞혔다. 듣는 사람들은 곡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무의미한 소리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B그룹의 사람들이 A그룹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이런 거 하나 맞추지 못해.”라고 빈정댄다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지식의 저주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몰랐을 때를 상상하지 못해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현상이다.

학교 현장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교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학생들이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원맨쇼를 펼치나 결과는 예상 밖일 때가 많다. 교사가 아는 것만큼 학생들은 모르고 있는데 학생들이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혼자 열을 낸다. 정작 학생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헤매니 성적이 올라갈 수가 없다. 많이 알고 있는 교사가 반드시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게 된다. 학교 현장에 있을 때 이런 경우가 가장 낭패스러웠다.

정치가에게 지식의 저주를 적용하기도 한다. 처음 정치에 입문하면 바르게 깨끗하게 정치를 하다가도 정치에 때가 묻고 정치 전문가가 되면서 점점 민심과 멀어지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자신들은 민심의 명령이라고 행동하나 정치인의 욕심으로 비칠 때가 많은 것이다. 정치인이 알고 있는 것과 민심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잣대와 전문성으로 잘못 민심을 재단하게 되면 지식의 저주에 빠지게 된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자신의 박자에 맞추어 책상을 두드린다. 어떤 때는 느리게 두드리다가 어떤 때는 분노로 가득한 리듬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눈물을 흘리며 책상을 두드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명 나게 책상을 두드린다. 창밖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민심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이 간곡한 리듬만은 민심이 잘 이해할 것이라고 책상을 두드리지만 미안하게도 창밖에 있는 민심들은 시끄러운 소리로만 들릴 뿐 무슨 말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점점 경륜이 많아질수록, 전문가가 되어 갈수록, 한 분야에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지식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더욱이 잘못된 지식에 휩싸여 편견이나 선입견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낭패는 없다. 결국에는 개인이나 집단에서 소통의 단절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점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니 경륜이 쌓이고 뭔가를 점점 많이 알아가는 것도 무척 조심스러운 일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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