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2] 종묘(宗廟), 문묘(文廟)의 배향 인물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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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2] 종묘(宗廟), 문묘(文廟)의 배향 인물

2023. 12. 08 by 영주시민신문

고려, 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왕과 같이 배향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름하여 ‘종묘배향공신’. 왕이 승하할 경우 그의 치세에 큰 공을 세운 명신을 그 왕과 함께 왕실 사당에 모시는 것으로, 당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한다. 그래서 3대 영의정, 3대 대제학도 종묘배향공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종묘배향공신에 오르게 되면, 공신이라는 위신에 걸맞게 특혜 또한 엄청났는데, 심지어 후손들이 공신 가문이라는 이유로 처벌이 면제되기까지 했다.

고려 태조의 배향공신은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최응(崔凝) 이렇게 여섯 분이고, 조선 태조의 배향공신은 조준(趙浚), 이화(李和), 이지란(李之蘭), 조인옥(趙仁沃), 남재(南在), 이제(李濟), 남은(南誾) 이렇게 일곱 공신이란다.

나라의 공신은 아니지만, 공자의 사당인 성균관 문묘나 지방 향교에 모시는 이른바 유명한 선비 「문묘명현(文廟名賢)」이라는 것이 있다. 문묘(文廟)란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칭으로 문선왕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공자의 별칭이므로 문묘는 곧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대표된다.

신라 성덕왕 때 당에서 문선왕(공자)을 비롯하여 십철, 72 제자의 도상(圖像)을 모시고 왕명에 의해 국학에 설치한 것이 우리나라 문묘제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에서는 문성왕묘를 국자감(성균관)에 설치하였다. 한국인 유학자로는 18인이 모셔져 있는데 이들을 「문묘 18현(文廟十八賢)」이라고 부른다.

문묘에 모셔지는 사람의 신위는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리학자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다른 말로는 ‘동국 18현’ 또는 ‘동방 18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조(前朝) 예우 차원에서 신라 2인(설총, 최치원), 고려 2인(안향, 정몽주)을 배향하고, 조선조 인물은 14명(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이다.

종묘 못지않게 문묘에 배향된다는 영광도 본인은 물론 양반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으로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기에, 단순히 학문의 업적만으로 선정될 수 있는 게 아니라 당대의 정치 상황까지 모두 고려되는 등 수많은 갑론을박을 거쳤다. 이이와 성혼은 문묘에서 배제되었다가 다시 배향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종묘나 문묘 어느 한 곳에만 모셔져도 대단한 영광일진데, 종묘와 문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도 있다. 조선조의 문묘와 종묘에 모두 배향된 인물은 단 6명에 불과했다.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이다. 후에 이언적의 신주는 자신의 문중으로 돌아갔기에 지금은 5분만 양묘(兩廟)에 배향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당대의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정치적 업적까지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치솟는 치적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종묘, 문묘 어느 한 곳에도 배향되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도 있다.

삼봉 정도전, 그는 유난히 어려웠던 고려말 정국 개혁을 이끌었고, 이제 막 세워진 나라를 정비하는 과정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즉, 유학을 근본으로 삼는 나라를 만들어 세계사에는 드물게 ‘조선 왕조 500년’ 대업이 이루어지도록 바탕을 다듬었다. 그리고 학문적 소양 또한, 누구에게 뒤지고 싶지 않을 내실을 갖췄지만, 자신이 만든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종묘, 문묘 어느 한 곳에도 초청받지 못하는 희한한 아이러니를 만들고 말았다.

금성대군을 포함한 정치적 죄인들이 대부분 복권된 숙종 대에도 정도전 그는 신원되지 못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사후 467년 만이다. 1865년의 일이다. 고종이 그를 사면하면서 시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일본의 사학자들까지 그를 재평가하였고, 어느 정치가에 의해 ‘가장 닮고 싶은 역사 인물’로 꼽히기도 했지만, 정작 종묘·문묘에서만은 복권 158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그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조선조가 끝나고 그가 꿈꾸던 백성의 나라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사후 625년간 아직도 그에 대한 완전한 신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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