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1] 정도전(鄭道傳)과 정몽주(鄭夢周)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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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1] 정도전(鄭道傳)과 정몽주(鄭夢周)

2023. 11. 23 by 영주시민신문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조선왕조를 개창 하려는 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동시대의 격동기를 장식한 큰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모진 운명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정몽주가 5년 일찍 태어나고, 정도전이 6년 뒤에 죽게 됨으로써 세상살이는 각각 55년, 56년으로 정도전이 1년 정도 더 길었다. 두 사람은 제각기 나름대로 역사에 남긴 업적이 대단나지만, 오랜 세월 그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사람의 죽음도 모두 이방원의 칼날에 쓰러졌지만, 정도전은 흔히 역적 노릇이나 한 사람쯤으로 치부된 반면,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정도전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잊혀진 인물이 되었지만, 정몽주는 선죽교에 뿌려진 선명한 핏방울이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빛나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정(鄭)씨이다. 정도전은 봉화정씨이고, 정몽주는 연일정씨이다. 관향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정씨이다. 태어난 곳도 정도전은 경북 영주(榮州)이고, 정몽주는 경북 영천(永川)이어서 같은 경상도의 출신이다. 공교롭게도 영주의 옛 이름이 영천(榮川)이고, 영천(永川)의 옛 지명이 영주(永州)여서 발음상으로는 서로 지명을 공유한 셈이 된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영해(寧海) 출신의 이색(李穡) 문하여서 ‘영(榮, 永, 寧)’자 인연의 연장선에 있다.

정도전의 고조부 정공미(鄭公美)는 봉화정씨의 시조로 봉화현의 호장(戶長, 고을 아전)이었다. 뒷날 이런 정도전을 두고 ‘한미한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몽주의 집안도 대단하기보다는 지방의 한미한 사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몽주 집안은 비교적 단아하고 평온한 편에 속했지만, 정도전은 외할머니의 출신 성분 때문에 천출(賤出)이라는 구설수에 적지 않게 시달려 왔다.

정도전은 정몽주가 명나라를 다녀오면서 지은 시문집의 서문을 지어준다. 반면, 정몽주는 본격적인 공부를 준비하는 정도전에게 “과거 시험은 문장 짓기가 아니라 『대학』과 『중용』이 중요하다”고 맥을 짚어준다. 그러던 중 정몽주가 24세로 먼저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 그것도 예부시 초장, 중장, 종장 삼단계 장원 급제라는 특별한 타이틀로 당대 최고의 인재임을 확인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정도전은 그를 찾아가 적지 않은 조언을 구하게 되고 2년 뒤 정도전 역시 21세의 이른 나이에 급제하게 된다. 나이로만 치자면 정도전이 정몽주보다 3년 일찍 급제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정몽주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리학의 대가인 이색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고, 2년 뒤 정도전도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동문(同門)으로서 서로 뜻을 맞춘 친구처럼 지냈다. 일생을 함께할 동심우(同心友)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시 4년 뒤 정도전이 아버지, 어머니 상(喪)을 연속으로 당하면서 4년 가까운 시묘살이에 들어가게 되고, 이때 정몽주가 보내준 책이 『맹자』였다. 정도전은 이 책을 곰삭여 평생 자신의 모토로 삼는다.

두 사람은 모두 향리 집안에서 중앙 과거에 급제한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색의 성균관이 그들의 결집 장소가 되었다. 스승 이색에 이어 두 사람도 성균관 대사성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진사대부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당시에는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불렀다. 성리학이 백성을 잘살게 하는 실질적인 학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원파의 득세 속에서 친명파 정도전은 나주 거평부곡 유배되고, 이어 정몽주도 울산 땅으로 유배되는 등 진통이 있었다. 다행히 정몽주는 곧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정도전은 무려 8년 이상을 나주, 영주, 삼각산, 김포, 부평 등에서 유랑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는 신진사대부들의 개혁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혁신적인 개혁이 전제개혁(田制改革)이었다. 이성계와 정몽주, 정도전이 조준(趙浚)을 지지하여 토지를 국유화하고 권문세족의 논밭을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눠 주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연히 귀족들이 반대했지만, 백성들에게는 하얀 이밥(쌀밥)이 돌아가게 되는 백성의 나라가 예고된 것이다.

이때까지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함께 개혁을 완수했지만, 이 무렵부터 둘에게는 이견이 나타난다. 정몽주는 고려왕조 내 점진적 개혁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반면, 정도전이 보는 고려왕조는 몇몇을 고치는 것으로 결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없기에 오직 새 나라 개창만이 백성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판단이었다.

‘조선 개국’이라는 커다란 갈림길에서는 대립 되어야 했던 두 사람. 결국, 그들의 운명은 엉뚱한 곳에서 비운으로 끝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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