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0] 한성부(漢城府)와 삼판서고택 사람들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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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70] 한성부(漢城府)와 삼판서고택 사람들

2023. 11. 09 by 영주시민신문

한성부(漢城府) 혹은 한성(漢城)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조선 및 대한제국 최고의 도시였다. 현재도 서울특별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대한민국 수도(首都)의 권위를 고수(固守)하고 있다.

조선 500년을 포함하여 600여 년 동안 나라의 중심지로 군림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 한성부를 다스리는 관직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혹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한다. 조선조 정2품의 관직이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늘날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듯이, 한성판윤 역시 어전회의에 출석해 국정을 논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더구나 사법 업무까지도 겸했으니 감히 그 권세를 상상할 수 있겠다.

조선이 갓 개국되었던 15세기 초 한성부 인구는 10만 명 내외였다고 한다. 지금은 100여 배나 불어난 1,000만 인구를 거느린 세계적 거대 도시(Megalopolis)가 되었다.

당시 한성의 중심부에는 중심을 둘러싸는 18km의 한양도성(漢陽都城)이 설치되었는데, 한양도성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일컬어지는 유교의 오상(五常)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념을 구체화하여 성문(城門, 4대문)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동쪽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의 흥인(興仁)에다 수구(水口)가 매우 허(虛)해  ‘之’ 자를 더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이 되고, 서쪽에는 의(義)를 두텁게 갈고 닦으라는 뜻으로 돈의문(敦義門, 현재 소실), 남쪽에는 예(禮)를 숭상하는 문인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 북쪽은 지(智)혜를 넓히라는 메시지를 담아 홍지문(弘智門 → 肅淸門 → 현재는 肅靖門)을 세웠다. 그리고 중앙에는 믿음[信]을 넣어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보신각(普信閣)을 세웠다.

모두가 영주 삼판서고택 출신 삼봉 정도전(鄭道傳)이 설계한 작품이다.

조선은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했다. 그리고 천도 이후 각종 공사를 진행하여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단(社稷壇, 토지신 사당)을 완공하고, 궁궐(경복궁)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宗廟, 왕실 사당)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광화문(光化門, 궁궐 정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署)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바탕 위에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한 한양도성을 쌓았다. 도성은 성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각각 정해져 있었다. 성곽 안쪽이 오늘의 서울 중심업무지구(CBD, 都心)를 형성한 곳이며, 그 바깥쪽으로 성저십리(城底十里)가 있었다. 이 모두 정도전의 궁궐 설계 바탕 위에 그려진 것들이다.

한편, 한성판윤을 지낸 정도전의 동생 정도복(鄭道復)도 삼판서고택 출생이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에 이어 한성판윤으로 있다가 형이 죽은 후 문하찬성사에 제수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낙향한 인물이다.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영주로 낙향하여 부친(정운경)의 묘소 가까운 이산면 한성골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 마을 지명유래는 한성판윤 정도복이 살았던 마을이라 해서 ‘한성골’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쓰여있다.

또, 정도전의 매제인 황유정(黃有定)도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그는 공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여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 바턴을 이어간 인물이다. 말년에 고향 영주로 낙향하여 처가 집을 물려받아 ‘삼판서고택’의 주인이 되었다.

정도전의 맏아들 정진(鄭津)도 세종 시절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다시 판한성부사를 제수받아 두 번에 걸쳐 판한성부사를 역임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청계천 준설 작업을 시행하고, 수문을 넓히고 돌다리를 건설한 공로가 있다는 선정 기록이 있다. 그 뒤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친다.

정진은 평택을 주 연고지로 삼지만, 아버지의 집 삼판서고택과의 관련을 끊을 수는 없는 인물에 속한다. 특히, 정진은 부친을 제거한 이방원(태종)에 의해 부친이 귀양살이했던 나주에 목사로 기용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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