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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90] 퇴계의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에서 영주 보기

2023. 11. 02 by 영주시민신문

김신중 시인

이산서원은 영천군(이후 영주군)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서원이다. 1558년 군수 안상(安瑺)이 학사(學舍)를 건립했는데, 이듬해 퇴계 선생이 학사를 서원으로 할 것을 권유하여 이름을 이산(伊山)으로 하고 ‘이산서원기’를 쓰고 서원 최초의 ‘원규(伊山院規)’를 만들었다.

퇴계 선생 살아생전에 가장 아끼고 애착을 가졌던 곳이 바로 이산서원이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도산으로 돌아올 때 이산서원에 머물면서 직접 유생들에게 강론할 정도였다.

영주중에서 술바위 다리로 넘어가는 남간재(번고개) 바로 넘어 두께바위를 오르는 데크 입구가 이산서원이 처음으로 세워진 곳이다. 지금은 옛터가 참깨밭으로 변해 있고, 반대편에는 아파트가 들어와서 번잡하게 되었으나 이산서원기에는 ‘읍내와 동떨어지고 조용하여 세속의 일이 아주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퇴계 선생은 ‘이산서원기’를 쓰면서 영주와 영주 사람에 대한 글을 남겼다. 선생이 460년 전에 영주와 영주 사람들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460년이 지난 오늘날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선생은 영주를 소백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산수가 빼어나고 풍속이 아름다워 인재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소백산은 예로부터 산수의 빼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산수는 천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으니 소백산 기슭에 터를 잡은 영주는 축복받은 땅이라는 말도 어쩌면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소백산은 빼어남과 더불어 넉넉함도 있으니 영주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지붕 아래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연은 하늘이 주는 것이고 문제는 풍속(風俗)이다. 선생은 영주의 풍속이 아름답다고 했다. 영주에는 문예(文藝)를 숭상하고 함께 기거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풍속이 있다.

영주에는 거접(居接)이 매우 성행했다. 거접은 과거를 보기 위하여 글방이나 절에 모여 학문을 닦는 것을 말하는데, 영주는 학문을 위해 온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었으며, 다른 지방에서 책 상자를 지고 오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든 거접 인원이 점점 많아져서 번거로울 만도 한데 영주 사람들은 이들을 싫어하지 않고 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모여서 공부하자니 경비가 문제였다. 옛 영주 관청에서는 이들의 경비를 모두 충당해 주었다고 했다. 영천군수 이항(李沆)은 몇 섬의 곡식을 마련하여 인재를 길렀는데 이를 전담하는 사람을 두어 관리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중단하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지원했다고 하였다. 퇴계 이황은 영주는 인재 육성에 정성을 다하는 뜻에 있어서는 다른 고을에서는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유생들이 공부하는 경비는 마련해서 지원했으나 공부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다. 고을의 의원을 빌려 잠깐 모였다가 끝내기도 하면서 지역의 많은 사람이 장소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군수 안상(安瑺)이 학사 건립을 추진하는데, 공사를 계획하고 인부를 가늠하여 비용을 마련하는데 영주의 어른들과 유생들이 군수의 뜻에 감복하여 정성껏 곡식과 물자를 내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산서원의 시초가 된 학사(學舍)가 건립되었다.

이렇게 선생은 이산서원 설립 과정을 기록하는 내내 영주와 영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영주 사람들의 생각을 가감 없이 칭찬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발 벗고 나서서 서원을 설립한 예는 전국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어쩌면 이때부터 영주의 교육열이 대단했던 것 같다.

460년이 지난 오늘날, 과연 영주는 인재 양성을 위해서 매진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은 있는지도 한번 돌아봐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풍속이 우리에게 육화(肉化)되어 우리의 정체성으로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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