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삼판서고택은 영주의 대표적인 고택이다. 여말선초에 세 분의 판서가 살았던 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집의 첫번째 판서는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이다. 정운경은 이 집을 사위인 황유정에게 물려주었는데, 황유정이 조선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유정 또한 사위인 김소량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고, 김소량의 아들인 김담이 이조판서에 올라 삼판서를 완성하였다.
삼판서고택은 원래 영주 시가지 중앙에 자리 잡은 구성산(龜城山, 구성공원) 남록의 거북꼬리에서 수백 년을 이어오다가 1961년 영주 대홍수 이후 집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당시가 한국전쟁과 대홍수 등으로 녹록치 않던 시절인지라 보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치되었는데, 수년 후에는 그마저 철거되고 말았다.
영주동 431번지가 그 주소인데, 이후 431번지 대지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어 삼판서고택은 약 40여 년간 복원되지 못하다가 2008년 서천을 내려다보는 구학공원 언덕 지금의 자리로 이건 되었다. 이후 삼판서고택은 미리 이전 복원된 제민루와 함께 선비의 고장을 상징하는 영주 관광 명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기맥이 모인다는 구성산, 그 중요부 아래에 있었던 삼판서고택에서는 위에 언급한 삼판서 외에도, 정도전, 황전, 김증 등의 학자와 명신들이 줄줄이 배출되었고, 정승, 판서, 성균관 대사성, 참판, 홍문관 교리, 지방관 등 15명이 넘는 거물급 인물이 배출될 정도로 명가 중의 명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런 명가의 뿌리가 박힌 삼판서고택 사람들은 자긍심도 남달랐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주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면서, 심지어 자기들의 종손 자리는 영주군수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지역의 저명한 유림인 학사 김응조는 이 고택을 두고 ‘영주의 유일한 고적’이라고 칭찬했다고도 한다. 이 건물은 고려 시대 창건임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7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삼판서 고택의 첫 번째 판서는 봉화정씨 염의(廉義)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이다. 그는 영주에서 태어나 영주향교와 복주향교(안동)에 다닐 때 매번 수석을 놓치지 않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외삼촌인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에 올라가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지방 관직으로 나아가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는 한편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다시 놀라게 했다고들 한다.
그는 공정과 정의로 고을을 다스렸고,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이 되었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높은 벼슬도 지냈지만 늘 춥고 배고픔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친구들이 그의 묘에 ’廉義先生‘(염의선생)이라고 사시(私諡)하였다고 한다.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판서 평해황씨 미균(米囷) 황유정(黃有定, 1343~1421)은 고려말 한성판윤‧공조‧형조‧예조판서를 두루 지낸 인물이다. 그는 정운경의 사위이면서 정도전의 매제가 된다. 어려서부터 논어를 즐겨 읽었으며, 시문에 뛰어나 12살에 이미 안동 도회(都會:유림의 모임)에 나가 「병서(病署)」라는 제목의 시(詩)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판서고택의 세 번째 판서 선성김씨 무송헌(撫松軒) 김담(金淡, 1416~1464)은 삼판서고택에서 태어나. 형 김증(金潧)과 한양으로 올라가 19세의 나이로 형과 함께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이렇게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학사에 선발된 것은 그들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후 김담은 이순지(李純之)와 더불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만들어낸 대 천문학자가 된다. 김담은 외직에도 나아가 충주목사, 상주목사, 경주부윤 등을 지내고, 1463년 이조판서에 제수(除授)되었다.
혹자는 삼판서고택을 ‘정도전 생가’라고 홍보하여 관광객들을 유치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세 판서의 명망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망설여진다. 셀럽들이 각각 너무 현달해서 집중이 어렵다는 뜻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