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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89] 정쟁(政爭)과 민생(民生)

2023. 10. 26 by 영주시민신문

정쟁과 민생은 꼭 반대말인 것 같지만 원래 반대말은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서로 다투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이제부터는 민생이라고 하면서 그때부터 시장에 가서 어묵도 먹고 사람도 만나면서 민생을 보살핀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부정적인 말로 변질된 게 아닌가 싶다. 돌이켜 보면 이런 모습이 전환기마다 늘 있어서 상투적이기는 한데 뭔가 좀 있어 보이는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해 본다.

정쟁은 반드시 나쁜 말은 아니다. 정치에서 다툼은 정당의 주장이나 이념적인 스펙터클에 따라서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지향하는 이념이나 정책이 다른 데도 다투지 않고 늘 화합하고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은 화합이 아니라 야합이 될 수도 있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정당은 본질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다. 다만 누구의 말처럼 정반합(正反合)을 통해서 새로운 지향점으로 가는 것을 대립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싸움의 본질이 돼야 한다.

일본이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왜곡하여 기록한 신문에 ‘조선 왕조는 중기 이후 사화(士禍), 당쟁(黨爭) 등의 내분을 거듭하면서 정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비정(秕政·나쁜 정치)은 계속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니’ 하는 기사가 있다. 조선이 당쟁으로 사회가 정체되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는 신문 기사다. 일제가 조선 강점을 합리화한 가장 대표적인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조선에서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은 당쟁이 주된 원인이며 그래서 사회가 정체되어 발전이 없으니, 일본이 조선을 침략·강점해서 조선인을 지배해야 마땅하다는 식민사관의 논리다. 아주 그럴듯한 일본의 주장을 요즘 정쟁에 그대로 대입(代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정쟁을 보면서 싹 갈아엎어야 한다면서 분노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다툼 자체를 나쁘게 보면서 정당 정치를 부정하는 것은 위험한 시각일 수도 있다.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라고 한다. 원래 ‘이판(理判)’은 공부와 참선을 잇는 이판승을 뜻하고 ‘사판(事判)’은 사원의 살림을 뒷바라지하는 사판승을 말한다. 조선에 들어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펴면서 승려들은 천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승려가 되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이판이든 사판이든 마찬가지라는 데서 이판사판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판사판은 사전에서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정쟁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있을 수밖에 없는 다툼이지만 싸움이 이판사판에 이르게 되면 큰 문제가 된다. 정쟁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는 대화도 없고 소통도 없으며 싸움을 위한 싸움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될 때 민생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정쟁에 염증을 느끼고 ‘그러면 그렇지, 정쟁이나 당파 싸움이나 뭐가 달라.’ 하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에서 상대방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철거하고 민생을 살리는 현수막을 걸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무척 다행이다 싶기는 하지만 그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 국민이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정말 이번만은 보여주기나 구호에 그치지 않고 관련법을 개정하고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권력을 위한 정쟁이 아니라 민생을 위한 정쟁으로 서로 다투었으면 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또 해 본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 간에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 게임이 성행했다. 이때 충돌 직전에 운전대를 바꾸는 사람은 겁쟁이(chicken)로 놀림을 받았는데 바로 치킨 게임이다. 이판사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게임이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가 그랬다. 문제는 그 자동차에 정치인만 탄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판사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른 정쟁으로 다투어야 자동차에 탄 국민이 다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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