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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88] 무현금(無絃琴)의 소리

2023. 10. 19 by 영주시민신문

오동잎은 가을의 대명사였다. 입추가 지나서 가을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떨어지는 게 오동잎이라서 그렇다. 커다란 오동잎 하나 떨어지니 천하에 가을이 오는 것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는 말이 있다. 원래 가을이란 게 쓸쓸한 계절이라 오동나무 잎새가 툭 떨어지니 그 서글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오동나무에 달이라도 하나 걸리면 옛 선비들은 시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필자도 오동나무와 소소한 인연이 있다. 영해에서 잠시 근무할 때 하숙집 방 바로 옆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객지 생활이라 마음이 적적한 한밤에 뭔가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툭 떨어지는 소리.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소리를 잊을 수 없을 만큼 생생하다. 그것은 가을이 오는 떨어지는 소리요, 우주의 한 부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 같았으니 소스라칠 만도 했다.

가을의 소리는 소리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가을은 아무 소리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인생의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다. 갈대가 몇 번만 서걱거리다가 보면 금방 가을이 다가오듯이 인생의 가을도 그렇게 소리 없이 다가온다. 툭 하는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소리가 있는 것보다는 훨씬 깊고 오묘함이 있다. 가을에서 진하게 소멸을 느끼는 것도 아마 소리소문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일 것이다.

무현금(無絃琴)을 탄다는 말이 있다. 무현금은 줄이 없는 거문고를 말한다. 도연명은 무현금을 가지고 있었는데 술자리가 끝나고 그윽하게 취하면 그 거문고를 탄다고 했다. 어떤 기록에는 손으로 어루만져 뜻만 부쳤다고도 하고, 이백은 ‘오묘한 소리가 절로 곡조를 이뤘는데, 단지 줄이 없는 거문고를 탔었네.’라고 노래했다. 꼭 소리가 나서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귀로 듣는 소리보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가 더 진실일 수 있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가 있다. 달빛 아래서 어떤 선비가 거문고를 타고 있는 그림이다. 아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차를 끓이며 다소곳이 앉아 있다. 절벽 위에 달빛은 교교하게 흐르고 달을 바라보며 무현금을 타고 있다. 선비는 거문고에서 곡조를 보고 달빛에서 소리를 듣는다. 그림인데 색이 없고 음악인데 소리가 없다. 아이를 찾는 말도, 선비를 부르는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데도 없고, 없는 데도 있으니, 현실을 뛰어넘어도 한참을 뛰어넘었다. 이런 세상은 그냥 우리 마음에만 있을 수 있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소문이 끊어지지 않는 요즘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이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도 점점 격화되고 있다.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가고 있다. 총소리에, 비명에, 여기저기 아우성치는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 우리에게도 부딪히는 소리만 여기저기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소리에 소리가 섞이고 부딪혀서 더 이상 소리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월하탄금도의 여백이나 여유가 어디에도 없이 소리만 꽉 차 있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 없는 가을은 있지만 사람 사는 가을에는 소리가 없을 수 없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그저 꿈일 뿐이다. 그러나 가을의 구석 자리를 잘 찾아보면 소리가 없는 곳이 있다. 아직은 월하탄금도의 비인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곳에서 무현금을 타지는 못할지언정 달을 보고 산을 보면서 자연이 그윽하게 들려주는 가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뭔가 삶이 깊어질 것만 같은 계절이다. 세상은 늘 그래왔듯이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아무리 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은 외면하지 못하겠다. 이러한 거대한 폭력 앞에서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렇다고 거문고를 타면서 한가로운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 그러니 무현금을 들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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