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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85] 이름論

2023. 09. 22 by 영주시민신문

제주도에 가면 ‘소리소문(小里小文)’이라는 책방이 있다. 주인 말로는 작은 마을의 작은 글들이라는 뜻으로 작은 마을에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책을 파는 곳이란다. 소리소문없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는 좋은 책을 판다는 뜻도 있고, 소리소문없이 은근히 퍼져나가는 좋은 시골 책방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참, 가게 이름도 예쁘고 뜻도 괜찮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책방을 둘러보면 다른 서점과는 구분되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게 참 묘한 것이 이름에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옛날에는 한 집에 팔구 남매는 보통이었다. 어떤 집은 딸만 예닐곱 명 낳아서 아들을 낳으려는 소망을 이름에 넣었다. 그런 집 따님들 이름을 보면 일순, 이순, 삼순 이런 식으로 숫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는데 마지막에 가면 으레 차남이나 끝순, 말순과 같은 이름이 붙는다. 딸을 낳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고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것이다.

가끔은 이름 때문에 힘 들어 하는 경우도 본다. 소설 〈용천뱅이〉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김막수’로 지은 이야기가 있다. 사회주의 사상에 매몰되어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아버지가 마르크스와 발음이 비슷한 막수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졌던 좌우 이념 대립을 이름으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주인공은 결국 ‘김영진’으로 개명하여 아버지의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똑같은 상황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따라 반대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자살’이라고 말을 할 때 ‘살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위기’라고 할 때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해봤자’라고 말할 때 ‘해보자’라고 마음을 북돋워 주는 사람도 있다. 말이 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씨가 말이 되어 우리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보면 정말 말의 달인들이다. 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대변인의 말을 들어보면 정당의 입장에 따라 정반대의 말을 하는데 논리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일리가 있어서 숨이 턱 막힌다. 논리 앞에 본질이 왜곡되는 순간인데도, 논리가 너무나 정연하여 속는 줄 알면서도 우리 같은 서민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논리 앞에는 욕설이 제격인데 그럴 만한 용기도 없으니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이름 붙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혁명을 쿠데타라고 이름짓기도 한다. 이름의 옳고 그름을 역사가 판정할 때까지 쿠데타와 혁명이 한참 동안 힘의 논리에 좌우되면서 오락가락한다. 실제로 그런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실을 판단하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말만큼 쉽지 않다. 당시에는 최선이다 싶어 이름만 보고 달렸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변절이고 아부였으며 역사 앞에 죄인이 되는 그런 경우도 있다.

한 시인은 이름을 부를 때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다. 우리는 사상(事象)을 읽을 때 논리보다는 본질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논리는 정연하기는 하지만 말장난에 그칠 수 있다. 말의 논리로 상대방을 억누르기보다는 사상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의 움직임이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기적인 향기를 맡으면서 이름을 짓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어쩌다 이름을 잘못 짓게 되면 이름을 받은 사람은 평생 큰 짐을 지고 살아간다. 역사적 상황을 풀이하면서 이름을 잘못 지어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어마어마함을 종종 본다. 그렇다고 이름을 지을 때 예쁘고 부드러운 이름만 지을 수는 없다. 이름을 지으면서 사실을 예쁘게 꾸며 사람을 혼란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폄하시켜 사람을 욕되게 해서도 안 된다. 이름을 짓기 전에 생각이 앞서니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게 참 어려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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