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6] 영주의 3대 고택, 백암종택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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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6] 영주의 3대 고택, 백암종택

2023. 09. 07 by 영주시민신문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이 기거하던 가흥동 서구대(西龜臺) 아래 선성김씨 백암종택(栢巖宗宅)은 1987년 봉화읍 문단리 오신동 마을 사암건널목 부근으로 옮겨져 있다.

원래 이곳은 영주군 수민단면 백암(栢巖, 봉화읍 문단리 뱀바우) 마을로 465년 전 바로 그가 태어난 마을이다. 그러니 반 천년에 가까운 긴 외유를 마치고 귀향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 있었던 500년 고향마을은 그때의 백암마을이 아니었다. 마을 이름부터 바뀌었다. 당시에는 마을 이름이 ‘백암’이어서 이를 자신의 자호로 삼았지만, 그의 백암(잣바우) 마을은 어느 날부턴가 ‘백바우’로 되더니 급기야 ‘사암(蛇岩, 뱀바우)’가 되어 있었다.

더욱이 성이성 집안의 계서정과 이웃하면서 차분하게 거닐었던 백암마을은 근대 교통 시대가 되면서 철로, 신작로가 힘차게 뻗어 나가 조용하던 옛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당초에 그가 서천의 서구대 아래에 세워 두었던 구학정(龜鶴亭)도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하고 430년 동안이나 지켜오던 가흥동을 떠나 이곳 뱀바우 마을 언덕으로 옮겨지고 말았다. 옛 모습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백방 노력했지만, 옛 경관을 따라잡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몇 프로쯤 부족해 보이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백암(栢巖)이 건립했던 가흥동 구학 산록의 백암종택과 구학정은 앞쪽으로는 풍요로운 들판을 깔아두면서, 동쪽으로는 구산(龜山, 구성산성), 멀리 남쪽으로는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구학정이었다. 또한, 청룡이랄 수 있는 서구대와 백호에 해당하는 구학봉 낮은 줄기가 포근히 감싸는 평온한 자리이며, 서천(西川)을 앞에 두고 동구대와 건너다보는 짜릿한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전국 여느 정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늘 수려한 자연경관과 동화되었기에, 자연의 일부로 지어진 백암종택과 구학정이 지금보다 훨씬 멋스러웠을 상상에 잠기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점은 백암 스스로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백암(栢巖) 김륵(金玏, 1540~1616)은 이 지역 명유(名儒)인 소고 박승임, 금계 황준량에게서 수학하다가 당차게 퇴계 이황을 직접 찾아가 문인으로 허락받았다. 그러나 사마시(司馬試) 합격 직후 생부 김사명과 스승 이황이 연이어 사망하자, 고향 영주에서 퇴계의 위패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배향하는 등의 일을 추진하였다. 이후 이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고, 그리하여 34세 젊은 나이로 이산서원 원장에 추대되는 영광을 누렸다.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때는 금기시 되던 단종의 묘를 배알했으며, 나아가 묘 옆에 제청·재실·찬청을 짓고 처음으로 「魯山君」이라는 호칭을 신주(神主)에 써서 모셨다. 그런 정성 때문인지 이전의 신임군수마다 죽어 나가던 괴변이 이후부터는 중지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도 안집사(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왜적을 토벌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 전라좌·우도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595년 대사헌이 되었을 때 시무 16조(時務 十六條)를 상소했는데, 이는 그의 정치사상을 집약하여 혼란한 시기에 유의해야 할 16가지의 덕목(德目)을 적은 것으로 혼란한 시기에 적절한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물러난 뒤에는 고향인 영천(영주)에서 오운(吳澐)·배응경(裵應褧) 등 벗들과 이산서원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가 1616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출생지인 수문단면 백암리(문단리)에 장사했다가 뒤에 상운면 운계리로 이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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