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의 앞부분이다. ‘그래도’의 ‘도’를 섬도(島)로 기발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사는 것이 고달파서 죽을 것만 같을 때, 떨어지고 떨어져서 더 떨어질 곳이 없을 때, 보통 하는 소리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을 때, 그때 우리는 말하기를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으냐며 다시 한번 해 보자고 말한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그래도’라는 섬은 아름답고 신비하며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평화로운 섬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생활 속에서 그래도라는 말을 꽤 많이 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문득 가장 좋아하는 그림 뭉크의 ‘절규’와 왓츠의 ‘희망’이 떠올랐다. ‘절규’는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다리 위에서 유령같이 사람이 양손을 얼굴에 대고 전율하면서 소리치는 그림이다. 해골같이 생긴 얼굴에 공포로 가득한 절규와 비명이 들리는 듯한 작품이다. 하늘에는 붉은 구름이 흘러가고 핏빛 노을이 화면에 가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무서운 공포를 느끼게 한다.
왓츠의 ‘희망’은 눈을 가리고 앉은 여자가 망가진 리라의 하나 남은 줄을 연주하고 있다. 화가는 모든 줄이 끊어지고 하나밖에 남지 않는 줄에다가 희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그림에는 화가가 입양했던 한 살배기 딸의 죽음이 가져다준 비통함과 상실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탄식이나 아픔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그림에 화가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희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배우는 것이다”라고 해설한 어떤 분의 해설이 마음에 다가온다.
영주 말에 “가마이 이쓰이 가마떼긴 줄 아나”라는 말이 있다.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때기인 줄 아는가 보지’란 말이다. ‘가마니때기’는 ‘헌 가마니’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사람들은 헌 가마니를 막 대한다. 쓸모가 없다면서 그냥 밟고 지나간다. 존중하지도 않고 가치를 따지지도 않는다. 하기야 헌 가마니야 헤지고 너덜너덜하여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으니 버림을 받는 것도 당연할 수도 있겠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가마니때기가 된 듯한 생각이 많이 든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한다. 정치는 세상을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삐걱거리며 돌아가니 아마도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저편에서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가마니때기가 된 것만 같은 것이다. 가마니때기로 있으려니 정말이지 쓸모가 없다는 자괴감(自愧感)까지 들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래도란 섬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래도란 섬에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 평화로운 정경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도래할 것이라는 꿈을 가져 본다. 뭉크의 절규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울부짖고 절규를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우리는 왓츠의 희망처럼 한 줄 리라 소리를 들으면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절규와 희망은 대척점에 서 있지만 한 지평선에서 함께 머물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살아가는 게 영 재미가 없거나 맥이 풀릴 때 두 그림을 본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고 전율이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 막 소리를 지르고 싶은 절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소리만 지르고 살아갈 수가 없다. 울분만 토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삶에는 긴장과 이완이 필요하기에 어느 하나만으로는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그래도라는 섬이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