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관광객이 삼판서 고택을 다녀온 후 실제 삼판서 고택이 있던 자리, 즉 삼봉 선생의 생가터를 보고 싶다고 했다. 함께 구성공원 아래 생가터를 찾아가서 여기가 삼봉 선생의 생가터라고 하니 너무 놀라는 것이다. 삼봉 선생의 생가터를 짐작하거나 설명한 아무런 표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럴 수 있느냐며 씁쓸해하는 그분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을 모시고 갔던 필자 역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삼봉 선생이 개경에서 벼슬살이하던 어느 날, 경상도 안렴사로 떠나는 정부령 홍(鄭洪)을 전송하면서 쓴 오언율시가 있다. “만년을 푸르러라, 저 계림이여/ 풍류는 대대로 사람이 있네./ 성초(星軺)로 백일에 하직 올리니/ 옥절은 푸른 봄에 비추이누나./ 교분은 집안이 통하는 벗이지만/ 이곳에선 이별의 시름 새롭네./ 구산(龜山)은 내 고향 고을이거니/ 나를 위해 유민(遺民)을 찾아봐 주게.”
구산(龜山)은 영주 시내에 있는 구성산을 줄인 말이다. 지금의 구성공원이 있는 산이다. 바로 구성공원 남서쪽 아래에 삼봉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택이 있었고, 경상도 땅으로 떠나는 정홍(鄭洪)에게 내 고향 영주를 찾아보고 영주 사람들을 찾아봐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다. 짧은 오언율시 안에 품은 마음을 구구절절하게 모두 쓰지는 못했으나 시의 행간에 고향 영주와 영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시를 쓸 때가 고려 말 공양왕 때니 조선 건국이 임박하여 삼봉 선생에게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으면서도 나주로 유배를 떠나기도 한 시기이기도 했다. 혁명의 물결이 도도하게 흐르던 때이기도 했으나 한순간에 거친 물결에 휩쓸려 갈 수도 있는, 엄중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건국이념을 가다듬으면서 저항 세력들을 설득하고 모든 백성이 인정하는 건국의 정통성도 확립해야 했을 것이다. 여말(麗末)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개혁의 대상이었던 불교와의 대립도 첨예하게 진행되던 때였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 고향 영주를 걱정했던 삼봉 선생이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건국하고 법령 제정과 한양 도성을 건설하면서 숨 가쁘게 달렸다. 500년 왕업의 기초를 닦은 거목이었다.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정조 때 삼봉집이 간행되었을 뿐, 고종이 문헌공을 하사하고 치제문(致祭文)을 내릴 때까지 470여 년 동안 폄하(貶下)와 왜곡(歪曲)의 역사 속에서 묻혀왔던 삼봉의 행적이다.
삼봉 선생의 생가터에 아직 아무런 표지석이 없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떠나서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종로구청 민원실 앞에는 ‘삼봉 정도전 집터’임을 알 수 있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조선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侍)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는 수송국민학교가 세워졌다.”라고 적혀 있다. 집터에도 표지석이 있는데 생가터 자리에 표지석이 없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생가터에 가 보면 여러 환경이 표지석을 세우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표지석을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세울 수도 없고 볼품없이 아무 곳에나 세울 수도 없다. 표지석을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쓰고 고민했다고 하는 얘기도 들었다. 어쨌든지 생가터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아무런 표지석이 없는 것을 보고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영주시민의 한사람으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영주에는 삼봉에 대한 표식이 거의 없다. 우회도로에 생긴 삼봉로만 떠오르고 다른 것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복원된 삼판서 고택도 삼봉 선생이 태어난 집이지만 세 분 판서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삼봉 선생에 대한 아무런 표식도 없다. 선생에 관한 뮤지컬이 공연된 적이 있다. 선생에 관한 연구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하물며 생가터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