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에서 꽃다운 나이의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하셨다. 전국이 폭우로 인해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중한 가운데에 그 선생님의 죽음은 또 다른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그 선생님은 뭐가 그리 무거웠을까. 관계 당국에서 조사하고 수사를 하고 있으니 그 원인이야 밝혀지겠으나 어떻게 꽃다운 생명을 돌이킬 수가 있겠는가. 정말이지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 성찰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 일을 시작으로 요즘 언론에서는 학생들과 관련된 각종 사건, 사고들이 쏟아지고 있다.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나같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선생님들은 교사와 학생을 위한 교육권 확보를 위한 집회를 하면서 다양한 요구를 쏟아내고 있다. 엄청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옷을 입고 집회에 나간 선생님들을 보면서 교직에 몸담았던 선배 교사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보통 가르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하나는 수업을 통해서 지식을 가르친다.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무가 잘 가르치는 것이다. 잘 가르쳐서 아이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지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이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아름다운 인성을 기른다. 지적 능력을 키우면서 인성을 기르자니 일단 전문성과 함께 책무성이 따르게 된다. 쉽지는 않다.
다른 하나는 생활지도이다. 학생들이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학생을 지도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다. 문제는 지적 능력을 기르는 것은 단계나 체계가 있지만 생활지도는 단계나 체계가 없을뿐더러 그 범위가 무한하다. 교실에서 휴지를 줍고 침을 뱉지 말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생명 존중에 관한 문제까지 선생님의 몫이 된다. 문제는 이런 생활지도가 학교생활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학교 밖까지 연계가 돼 모든 책임이 교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면 선생님들에게는 맡은 업무가 있다. 업무분장은 개인이 맡을 일을 체계적으로 나눠서 선생님 각자에게 맡기는 것을 말한다. 업무에 경중이 있기는 하나 가르치랴, 업무 보랴 그 짐이 가볍지 않다. 특히 담임을 맡거나 학교 폭력 업무, 교육과정 관련 업무, 방과후학교 관련 업무를 맡으면 가르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교육 당국에서도 이 업무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요즘에는 선생님들이 마음껏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발하고 창의적인 수업 방법을 구안하여 적용해도 아예 수업을 듣지 않거나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진다. 소위 학생이 수업을 방해해도 제지할 방법이 없다. 수업 방해 학생 행동을 제지하려 하면 “어어, 샘. 이거 정서적 아동학대인 거 아시죠.” 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야말로 절망감이 몰려온다.
어떤 때는 아이들의 문제가 학부모 간의 갈등으로 확대되고 소송으로까지 비화 되기도 한다. 아이들끼리는 금방 화해하고 웃고 얘기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생활하고 있는데 부모들 간에 감정이 격화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럴 때 학생과 학생, 학생과 학부모, 학부모와 학부모 사이에 낀 선생님은 악성 민원과 소송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호소하다가 병원을 찾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제 학교는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하는 선을 넘었다. 서로 배려하면서 양보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도 과감하게 버릴 때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는 하나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이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마음껏 가르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교사의 책무성 못지않게 학부모의 책무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법을 위반하는 학생들에게는 준엄한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경각심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방종이 자유를 넘어서는 몰염치한 세상은 막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