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3] 피휘(避諱)라는 미풍양속(美風良俗)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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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3] 피휘(避諱)라는 미풍양속(美風良俗)

2023. 07. 28 by 영주시민신문

옛사람, 특히 산속 사람들일수록 곰을 곰이라 부르지 않고 ‘갈색 짐승’이라고 했으며, 호랑이를 호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큰 짐승’이라고 불러 예우하는 사상이 깊었다. 단군신화에서 유래한 토테미즘 풍속인 듯하다.

고려조 예천에 흔(昕)씨 성을 가진 흔섬(昕暹)이란 사람이 있었다. 하필 고려 충목왕의 이름이 왕흔(王昕)이었다. 그러자 나라에서 흔섬에게 흔이라는 성 대신 권씨 성을 쓰게 하였다. 그렇게 예천권씨가 탄생하게 되었다.

고려말 성리학자 회헌 안향(安珦)은, 조선 세종의 아들 이향(李珦​)이 조선 5대 국왕(문종)으로 등극하자 그 이름을 피해 한동안 초명이었던 안유(安裕)로 돌아가거나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로 불렸었다. 이때 조선의 유학자들은 왕이 우선이냐 유가의 성현이 우선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결국, 왕을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자 이후 각종 문헌에서 안유(安裕)라고 쓰거나, 안향(安向)이라고 획 하나를 빼기도 했다가, 그것도 곤란할 때면 호를 사용했다.

『논어』가 공자 어록이니 ‘자왈(子曰)’로 시작하는 구절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로 해석한다. 「孔子」라고 적혀 있는 경우 「子」가 이미 존칭인 까닭으로 그냥 “공자”라고 읽으면 된다. 문제는 공자의 이름인 「丘」이다. 문장에 「孔丘」라고 나오면 ‘공모(孔某)’라고 읽어야 한다. 대구의 원래 표기는 「大丘」이었지만, 공자 이름 「丘」를 피하여 「大邱」로 표기해서 예를 다하고자 한 것이다.

피휘(避諱)는 지체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돌려 부르던 언어관습이다. 기휘(忌諱)라고도 한다. 기, 휘 모두 본래 ‘꺼리다’라는 뜻이기에, 함부로 호명하기를 꺼리는 군주, 성인, 조상 등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피휘는 ‘휘(諱, 이름)를 피하다’로 해석할 수 있다. 국호, 연호도 같은 의미로 적용되었다.

이런 관습은 존중받아야 할 대상의 <이름을 함부로 범하지 않는다>는 공경의 의미를 담은 미풍이 있다. 이런 관습 때문에 자나 호와 같은 일종의 별명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성인의 이름에 자(子)를 넣어 공자(孔子), 맹자(孟子)라고 한다든지,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관직이나 시호를 넣어 판서공(判書公), 문성공(文成公)으로 부르거나, 부모의 이름을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해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관습은 오랫동안 동양의 기본상식으로 유지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불가의 법명이나 카톨릭교의 세례명도 일종의 작호(作號)라고 볼 수 있다.

나라에는 국휘(國諱, 국왕의 이름)가 있고, 사회에는 성휘(聖諱, 성인의 이름)가 있다. 자기 가문에는 가휘(家諱, 조상의 이름)가 있는 것이다. 자기 존속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피휘 하여 수신자란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 밑에 괄호를 하여 본제입납(本第入納) 또는 본가입납(本家入納)이라고 쓰던 방식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예법에 익숙하지 못하면 버르장머리가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공식적 피휘 문화가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아직껏 남아있다. 예를 들면, 본인보다 지체가 높은 어르신이나 직장 상사일수록 이름 아닌 호칭, 혹은 성씨+호칭으로 부른다. 아랫사람이라도 좀 더 격식을 차려야 할 상황에서는 이름보다 호칭으로 부른다. 이름을 직접 부르는 건 상대를 낮추어 대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에도 TV에서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에 비천한 역을 배역하지 않도록 하는 내부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필자가 어느 학교장으로 취임했을 때의 에피소드다. 평소 편하게 지내던 친구의 형님이 갑자기 존대로 말을 바꾸시길래 깜짝 놀라 “왜 그러시느냐” 했더니, “단위 기관장께는 우리 스스로 존대를 해야 사회가 존경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던 말씀이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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