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 대왕은 핑크빛을 너무 좋아해서 자기가 입는 옷이나 집안의 모든 가구를 핑크빛으로 바꾸고 심지어 음식도 핑크빛만 먹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핑크빛으로만 살아가도록 법을 제정하여 산과 나무,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핑크빛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한 가지 푸른 하늘만은 핑크빛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퍼시 대왕의 고민을 들은 스승은 대왕이 잠든 사이에 안경 렌즈를 핑크빛으로 바꾸어주었다. 잠이 깨고 눈을 뜨니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잘 알려진 서양 동화 「핑크 대왕 퍼시」 줄거리다.
중학교 때 안경을 쓴 친구가 있었다. 눈이 좋아서 안경을 쓰지 않은 아이들이 무척 부러워했다. 안경을 쓴 친구가 왠지 똑똑해 보인다는 것이다. 안경 렌즈에 서린 김을 패드로 닦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느긋하고 멋있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한참을 자유롭게 뛰어놀 나이인데, 안경을 쓰고 축구를 할 때나 안경 렌즈에 김까지 서리니 그 불편함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이렇게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로마 황제의 딸인 공주가 매우 영리한 랍비를 만났다. 공주는 두뇌의 명석함에 비해 외모가 추하게 생긴 랍비를 놀리기 시작했다. 슬며시 속이 상한 랍비는 공주에게 물었다. 왕궁에 있는 술이 어디에 담겨 있는지 묻는 랍비에게 공주는 항아리나 질그릇에 담겼다고 대답했다. 보잘것없는 그릇에 술을 담아 놓았냐는 랍비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공주는 모든 술을 금은 그릇으로 옮겨 놓았다. 결과 담은 술맛이 모두 변해버렸다. 그릇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외모만 가지고 판단한 공주를 비판한 일화다.
요즘 우리는 편견과 선입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한 번 쓴 색안경을 잘 벗지 않는다. 안경에 색깔이 묻으면 닦으려 하지도 않는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늘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데 시비(是非)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내가 맞으면 맞고 내가 틀리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사상(事象)을 판단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대하여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정반대로 입장이 갈려서 누구 말이 옳은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사회가 편견과 아집,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그 사회는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하여 건강성을 잃어버린다. 뭐든지 제대로 들어야 판단하고 비판할 수가 있는데 몇 마디 말만 듣고 상대방을 판단해 버리고 공격 태세를 갖추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 우리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이 아닐 수가 없다. 이쪽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지점에 있는 사람들도 정체성의 공격을 당한다. 사람 구실을 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핑크 대왕 퍼시」는 이렇게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다. ‘핑크 대왕은 기뻐하며 그날 이후 매일 핑크빛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대왕이 핑크빛 안경을 썼기 때문에 이제 백성들은 모든 사물을 핑크빛으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고 원래 가지고 있는 사물을 보고 즐길 수가 있게 되었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핑크 대왕 퍼시와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깔을 보고 사는 백성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 당연히 사물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살아가는 일반 백성이 더 행복하다.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겉으로는 강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안쓰럽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말하기 때문에 감히 다른 사람들이 말을 붙이기는 어려우나 말이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말에서 감정이나 편견을 걷어버리고 나면 재미는 좀 없을지 모른다. 말에 감정이 섞이고 과장이 섞이면 훨씬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그래도 요즘처럼 점점 양극단에 사람들이 모이는 세상에서는 제대로 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