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1] 외재 정태진의 선유구곡(仙遊九曲)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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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61] 외재 정태진의 선유구곡(仙遊九曲)

2023. 06. 30 by 영주시민신문

최근 ‘주제여행’이라는 트랜드를 업고 조선 선비들의 구곡문화(九曲文化)가 별스럽게 조명을 받는 모양이다. ‘구곡(九曲)’은 말 그대로 계곡의 아홉 굽이를 뜻한다.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되었다. 선비들이 경영했던 자연의 원림(園林)인데, 조선 선비들의 핵심 산수 문화였다고 압축할 수 있다.

아홉 구비로 이어지는 임천의 산수는 군자적 삶을 체험하는 도학의 길이었고, 이상적 삶의 표상을 구현하던 자연 학습장이었다. 서책 속에 잠겨 있던 선비들에게는 자연을 통해 외연을 넓히며 강학과 음영의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풍류의 무대가 되어주었다. 자연 속에서 심미의식을 수련하던 원림 문화의 정수, 조선의 도원향이자 도학적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구곡은 단순히 풍광이 빼어난 곳을 선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선비들이 자신들의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차원 높은 공간이었다. 이른바, 조선 선비들 최고의 버킷리스트였던 셈이다. 그래서 구곡 문화는 중국에서 비롯됐지만, 중국보다 조선에서 훨씬 더 성행했다고 한다. 선비들이 구곡을 설정하고, 그것을 매개로 구곡시(문학)를 짓고, 구곡도(미술)를 그리며, 자연과 합치되는 누정(건축디자인)을 지으면서 성리학의 이상향을 현실에 정립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의 구곡문화는 우리 산천을 인문학의 보고로 만들어 갔다.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구곡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중 1/4 정도가 경북에서 성행하였다. 더욱이 경북 북부가 그 중심이다. 최근 ‘걷기 좋은 트레킹코스 1위’로 선정되었다는 정태진의 선유구곡도 그 중의 하나이다.

가흥2동 줄포(茁浦)마을에서 태어난 외재(畏齋) 정태진(丁泰鎭, 1876∼1959)은 20세기 학자요 독립운동가다. 나주정씨 줄포 문중의 종손이기도 하다. ‘파리장서’의 유림대표였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문장과 성리학을 익혔다. 그런 연고로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의 유림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활약했다.

만주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농자금 조달을 위해 1919년 일시 귀국했다가 유림단의 독립청원서인 이른바 ‘파리장서’ 소식을 듣고 바로 서명하게 된 것이다. 정태진은 이 일로 인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들어갔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귀국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어디를 가든 감시를 받아야 하는 소위 요주의(要注意) 인물이 된 것이다.

그는 줄포 집안 종손임에도 불구하고 문경의 심심산골로 옮겨 살아야 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골짜기를 찾은 것이다. 그곳이 문경시 가은읍의 선유구곡(仙遊九曲) 부근이다. 그는 이곳을 주유하면서, 많은 시를 남겨 후세 사람들이 눈여겨보는 ‘걷고 싶은 트레킹코스 1위’의 배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1959년 5월 8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유동 계곡은 일찍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등 명인묵객(名人墨客)이 즐겨 찾는 비경의 장소였던 모양이다. 최치원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仙遊洞」이라는 암각이 학천정(鶴泉亭) 앞 바위에 선명하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서,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운다는 1곡 옥하대(玉霞臺), 신령한 뗏목 모양의 2곡 영사석(靈槎石), 형용할 수 없는 맑은 물을 담은 3곡 활청담(活淸潭), 세파에 찌든 마음을 씻어내는 4곡 세심대(洗心臺), 바라만 봐도 좋은 여울목 5곡 관란담(觀瀾潭), 갓끈을 씻으면 홀가분해진다는 6곡 탁청대(濯淸臺), 목욕하고 바람 쐬기 좋은 7곡 영귀암(詠歸巖), 물소리가 피리 소리로 들린다는 8곡 난생뢰(鸞笙瀨), 옥 구슬 신발처럼 아름다운 9곡 옥석대(玉舃臺) 적절한 곳에 각자가 새겨져 선유구곡의 위치를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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