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예언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는 울진 근남면 출신이다. 전설에 의하면, 남사고는 어려서 불영사를 자주 들렀었는데, 거기서 만난 한 노승이 남사고가 남다른 인물이 될 줄 미리 알아보고는 세 권의 비결서를 주었다고 한다. 『천편(天編)』, 『지편(地編)』, 『인편(人編)』이었다. 노승은 이 책을 건네주며 무엇보다 덕을 쌓는 일이 최우선임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얼마를 지나 노승은 남사고의 공부를 점검할 양으로 집으로 찾아갔다. 당연히 1권인 『천편』부터 차례로 공부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남사고는 사람의 운명을 알아보는 『인편』에만 빠져 『천편』은 시작하지도 않고 있었으므로 노승은 남사고가 이 비결을 사리사욕 채우기에만 사용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책과 함께 그의 집을 불태워버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졸지에 비결서를 잃은 남사고는 그제야 정신을 추스르고 새로운 각오로 삼천리를 주유하여 비로소 지리의 요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 그가 소백산을 지나면서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한번은, 남사고가 영천(榮川, 영주)을 지나다가 어느 인가에서 유숙했는데, 때마침 비가 그치고 소백산에 허리 안개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상서로운 구름이다. 오래지 않아 병화(兵火)가 있겠지만, 이 산밑 사람들은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왜구들이 풍기와 영주에 당도하였으나 조령길로 돌아갔다고 한다.
남사고가 소수서원에서 수학할 때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댁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소고의 아들 박록(朴漉)과 함께 소백산에 올랐다가 동남쪽을 바라보고는 오랫동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진(辰)년과 사(巳)년 중에 섬나라 오랑캐가 난을 일으켜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해야 하는 액운을 당할 것이다.
이 난이 진년에 일어나면 나라는 구할 수 있겠지만, 사년에 일어나면 나라를 구할 수 없겠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소백산에는 병화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죽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공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에는 복지가 많은데, 그 가운데 살만한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 이곳은 모두 난을 당하여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땅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격암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이 진년에 일어나 조선 강토가 모두 병화(兵火)에 휩싸였으나 그가 제시한 십승지 중 『택리지』에 남아 있는 4곳은 모두 전란을 피했다고 한다. 그중 한 곳이 풍기 욱금동이다.『택리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소백산에 욱금동(郁錦洞)이 있는데 천석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 리이다.
그 위에 있는 비로전(毘盧殿)은 신라 때 옛 절이고 골 입구에는 서원이 있다. 소백산의 천석은 모두 낮고 평평한 골 안에 있고,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웅장하여도 살기(殺氣)가 적다. 먼 데서 바라보면 봉우리와 묏뿌리가 솟아나지 않고 엉기어 있는 듯하다. 구름 가듯 물 흐르듯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고, 때로는 자색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를 떠다니기도 한다.」
십승지설(十勝地說)」은 조선 후기에 유행한 『정감록』의 핵심 내용이지만, 그 뿌리는 일찍이 남사고에게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승지」는 처음에 10승지의 뜻이었으나 뒤에는 ‘가장 좋은’ 등의 의미가 되면서, ‘난리가 났을 때는 반드시 피난해야 할 곳’의 뜻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십승지」라고 알려진 곳은 전국에 60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그곳은 경치도 좋고, 풍수도 좋고, 기도나 수도에도 좋아서 토속신앙의 성지가 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