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이 안치되었던 태백산사고터(사적 제348호)는 봉화 춘양면 석현리 각화사(覺華寺) 북쪽 1km 지점의 해발 1,000m가 족히 되는 각화산 험산에 매달리듯 얹혀 있다. 임진왜란의 충격으로 화마나 반란군이 들어오지 못하는 비장의 심심산골에 사고지를 정한 것이다. 수호사찰은 각화사였고, 따라서 수호총섭(守護摠攝)도 각화사 주지가 맡아 있었다.
임진왜란 난리 통에 조선 4대 사고(史庫) 중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됐다. 우여곡절로 난을 피했던 전주사고마저도 정유재란 때는 소실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은 소실되기 전 산속으로 옮겨 화를 면했다. 병화에 놀란 조정이 실록을 내장산 깊숙한 골짜기로 피신시킨 결과이다. 조선 역사가 송두리째 불타버릴 뻔했다.
앞서 성주사고 화재는 너무 엉뚱했다. 관노(官奴)가 누각 위 산비둘기를 잡으러 불을 켜 들고 올라갔다가 사고(史庫)에 불이 붙으면서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태워 버렸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 터라 실록 보관은 늘 초긴장 상태였다.
그래서, 가까스로 남은 전주사고본을 저본(底本)으로 5부(1606년)를 새로 만들어 춘추관(春秋館, 서울), 정족산(鼎足山, 강화), 태백산(太白山, 봉화), 오대산(五臺山, 평창), 적상산(赤裳山, 무주)의 이른바 전국 5대 사고에 분산시켰다. 그러나 이들 중 춘추관본은 가장 먼저 이괄의 난(1624년) 때 소실되었고, 오대산본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그만 간토(關東) 대지진(1923년) 때 소실됐다.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중 행방이 묘연했는데, 북으로 넘어가 현재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돼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백산본은 1606년 봉안된 이후 300년 동안 태백산사고에 잘 안치되어 오다가 정족산본과 같이 1906년 조선총독부로 옮겨졌다. 이후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1950년에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의 경남도청 창고 신세를 졌으며, 전쟁 후 1954년에 규장각(서울대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1985년 정부기록보존소로 들어와, 국가기록원 수장고가 완성된 2015년부터는 이곳 최신형 서고에 안치되어 한숨을 돌리고 있다.
태백산사고 목조건물은 실록이 옮겨진 다음, 우리 의병부대와 일본수비대 간의 격전 중 각화사와 함께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그 뒤 각화사는 1910년에 복원되었으나 태백산사고는 110년이 넘도록 아직 복원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최근 민간 중심으로 <태백산사고지복원추진위원회>가 다시 구성되어 복원의 기치를 올리고 있다. 그간, 1988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1990년대 중반 지역주민 서명운동 등의 노력이 있었고, 2006년에는 문화재청에서 복구비 78억여 원이 편성되어 숙원이 성사되는 듯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국보 제151호「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그 보존 가치가 높은 세계적 보물이며, 이를 보관했던 사고는 역사탐방 교육장 등으로 활용성이 매우 높다. 또한, 당시 건물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잘 남아 있어 원형 복원에 문제가 없으므로 조속히 복원이 성사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