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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57] 우리나라 조선입국(造船立國)의 신화, 신동식 회장

2023. 05. 04 by 영주시민신문

<바다 위 5만 톤급 이상 큰 배 85%가 ‘made in korea’ 라면 믿어지십니까?>

한국을 먹여 살리는 5대 산업 중에서도 조선(造船)은 압도적이다. 무려 20년(2003~2023) 넘게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는 신화를 쓰고 있다. 그 신화의 주인공이 봉화 물야면 수식리 무짐이마을 평산신씨 종손 신동식(申東植)이다. 그리고 91세 신동식은 아직도 현역이다. 그러니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신화이기도 하다.

1932년생 신동식은 고2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란했다. 미국이 싣고 온 군수 물자를 체크하는 일은 하면서, 당시 부산 앞바다에 까맣게 떠 있던 군용선을 보았다.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생각으로 서울공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하지만, 정작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의 조부는 한말 국가외유고시 출신의 법관 신언집(申彦潗)이고, 부친은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의 신도순(申道淳) 변호사였기에, 종손인 신동식은 당연히 법관이 될 거라고 기대했었던 모양이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근근이 졸업하니, 이번에는 나라에 조선소가 없어 취업할 길이 막연했다. 전 세계 100여 개 조선소에 편지를 썼는데, 마침 스웨덴의 세계 최대 코쿰조선소가 한국 전쟁의 불쌍한 나라 청년을 받아주었단다.

1957년, 25세 신동식은 코쿰조선소에서 기초를 다진 후 더 큰 도약을 위해 해상 종주국인 영국에 도전한다. 이듬해, 당시 세계 조선쟁이들의 로망이라는 영국 로이드선급협회에 동양 유일의 국제검사관이 되었다. 전 세계 선박 건조를 감독하는 회사였다. 로이드회사 직원 신분으로 일본 출장 도중 한 교민 행사(1961년)에 참석한 자리에서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처음 만난다. 박정희의 설득으로 귀국하여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으로 일해보지만, 가난한 나라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다시 한국을 떠나고 만다.

1965년, 신동식은 운명처럼 미국에서 다시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호텔 방에다 대뜸 한국 지도를 그리고는 “삼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던지 배를 만들든지 해봐야 할 거 아니요?” 당장 돌아가자고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다. 일감은 없고 거지와 깡패들만 득실거렸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최대 조선소를 짓자고 하니, ‘양철 조각 하나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선박이냐’며 경제 전문가들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모함 속에서 <한국 조선공업 발전계획>을 만들고, 1967년 대만 국제입찰에 성공하여 처음으로 어선 7억$ 수출을 달성했다. 한국 조선산업의 시동이었다.

한국 최초의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이공계 출신의 36세 젊은 피 신동식을 파격적으로 경제수석(장관급)에 임명했다. 신동식은 당초 사양했으나, “당신은 로이드에서 세계 기업을 상대했으니 그 인맥으로 나가서 돈·기술을 꿔오시오.” 대통령의 준엄한 명령이었다. 그러면서 양철 한 조각 못 만들던 척박한 대한민국에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초대형 조선소를 지어보자는 담대한 도전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3년 한국은 선박 건조량, 수주량, 수주 잔량 등 3개 부분 모두 세계 1위를 차지하는 세계 최강의 조선국가가 되었다. 이날 신동식은 박정희 묘역을 찾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현재(2022년) 한국의 선박 수주 규모는 무려 453억$(약 60조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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