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56] 자신의 전 재산을 몽땅 소작인에게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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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56] 자신의 전 재산을 몽땅 소작인에게

2023. 04. 24 by 영주시민신문

영주군의 지주 강택진 씨가 자신의 재산 전부를 소작인에게 내주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이 기사는 지역에서 한두 번 소개된 바 있어 새로운 발굴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을 통 털어 놀라운 내용이므로, 그의 선언 100주년을 맞아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수일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頂門一針)되는 사실이 있었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삼십여 년 동안 지주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姜宅鎭) 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토지만 9천여 평)를 소작인조합에 내어주는 동시에 「소작인에게 告」한다는 글을 지어 그곳 소작회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강택진 씨가 그 가진 재산을 버리고 나선 그 동기와 이유 등 씨의 사상 전체는 특히 금일 본지 5면에 씨의 글을 발표한 터…이 소문을 들은 그곳 부근의 지주들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더라.」(1923년 4월 26일『동아일보』)

하연(何然) 강택진(姜宅鎭, 1892-1926)은 개성유수부(현 개성특별시)에서 출생하여, 세 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를 찾아 풍기 금계리로 이주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던 중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19세 때에 모친상을 당했다. 20세가 되던 1911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1919년 3월 지린성에서 결성된 길림군정사 재무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해 6~7월경 귀국한 그는 10월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 13도총간부 교섭부장을 맡았다. 또한,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순흥의 김교림, 풍기의 이풍환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출연을 권유하는 문서를 발송한 사실이 발각되어 1921년 3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 되었으나 이듬해 5월 건강상의 이유로 가출옥(假出獄)하였다.

출옥 후에도 1923년 1월 김동필(金東弼) 등과 함께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을 설립했고, 2월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4월「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는 폭탄선언과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인 논 30두락(9,360평)을 몽땅 소작인조합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는 가족을 데리고 상경해 사회 활동에 매진하였는데, 아이스크림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1923년 9월 전조선노농총동맹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5년 2월 경북사회운동자동맹 준비위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일경에 다시 체포되었고, 복역 중 건강 악화로 다시 출옥하였다. 1926년 2월 그의 출옥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하면, 그는 모진 고문으로 인해 손톱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선사상동맹에 다시 참여코자 했고, 오랜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6년 10월 24일 향년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풍기에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는데, 자택에서 출발한 상여가 묘지에 도착했음에도 아직 생가를 떠나지 못한 만장 행렬이 남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택진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아나키즘 평등사상을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간의 시대 분위기에 의해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독립운동가로 공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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