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망동 행정복지센터 뒤로 난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다 보면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게 격을 달리한 고택이 보인다. 유연당 김대현의 고택이다. 유연당은 원당천(현 원당로) 남쪽을 대표하는 고택이어서 구성산성의 삼판서고택(구학공원으로 이건), 서구대의 백암고택(문단리 뱀바우로 이건)과 함께 영주의 3대 고택으로 손꼽혀왔다. 특히, 김대현의 아들 8형제는 모두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그중 5형제가 대과(大科)에 급제한 명문가로도 유명하다.
유연당고택은, 본디 풍산 오미동에 살던 유연당 김대현이 1589년 그의 외가인 영천군 봉향리(영주시 휴천동)로 이주하여 건립한 건물이다. 그 후 사례(영주향교 아래) 마을로 옮겨졌다가, 1900년 이후 지금의 원대이(하망동)마을로 다시 옮겼다고 한다. 당호 ‘유연’은 도연명의 시 『飮酒(음주)』 가운데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 즉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남산을 바라본다’는 시구(詩句)에서 취한 것이다. 번잡한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자의 초연한 심경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일찍 타계한 아들 1명을 제외하고는, 여덟 아들이 모두 소과(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특히, 첫째 김봉조(金奉祖), 둘째 김영조(金榮祖), 다섯째 김연조(金延祖), 여섯째 김응조(金應祖), 아홉째 김숭조(金崇祖) 이렇게 다섯 아들은 대과(문과시)에도 급제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는데, 전국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어렵다.
이를 높이 평가한 인조(仁祖) 임금이, 그의 가문을 크게 칭찬하면서 연꽃 8송이와 계수나무 5그루를 하사했다는 데서 ‘팔련오계(八蓮五桂)’라는 말이 붙어 다니게 되었다. 이는 과거에서 사마시 합격방을 ‘연방(蓮榜)’이라고 하고, 문과 합격방을 ‘계방(桂榜)’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김대현 자신은 생원시 합격 후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를 지키며 학문에만 전념한 보통의 선비였다. 그러나 영주로 이주한 이듬해,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이산서원 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현달(顯達) 하였다. 그리고 45세 때 다시 한번 이산서원 원장에 추대된 것만으로도 그가 영주의 대표급 선비였음을 짐작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사람들을 모아 백암(柏巖) 김륵(金玏)의 휘하로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전년도에 부친상을 당해 아직 상중(喪中)이었지만, 그는 집 앞에다 구호 장막을 치고 난민들을 구제하는 등 백성들의 구휼에 앞장섰다. 당시 이 지역은 그나마 전화(戰禍)가 조금 덜해 각지에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전들의 농간으로 구호물자가 제대로 나누어지지 못하자 스스로 군수에게 나아가 구호 업무를 자청하였다. 더욱이 역병까지 창궐한 상태임에도 매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환자들을 구호하였다 한다.
1595년, 42세 늦깎이 나이로 성현도(경산과 청도 사이)의 찰방에 부임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601년 산음(경남 산청)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녹봉을 털어 전쟁으로 황폐해진 향교를 중건하는 등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 향교를 준공하던 날 노인들을 초대하여 기로연을 베풀었고, 참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지팡이와 쌀과 고기를 따로 보냈을 만큼 자상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향년 50세 나이로 산음현 임지에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염습할 옷가지가 없어 주위 선비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소렴(小殮)을 할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다. 유연당이라는 호에서 보듯이, 그는 산수를 즐기고, 때때로 문장을 나누며, 끝까지 초연(超然)한 선비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