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만주로 건너가게 된 연유는 크게 세 갈래 진다고 한다. 1차로 구한말 한반도 대기근을 피하여 만주로 이주했던 북쪽(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두만강 건너 한반도와 가까운 길림성(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2차는 나라를 빼앗겼던 1910년 전후 ‘나라 되찾기’를 다짐하며 만주로 향했던 경상도 사람들인데, 좀 더 먼 흑룡강성(할빈)에 본거지를 틀게 된다.
3차는 1930년경 만주국을 삼킨 일제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만주로 떠났던 삼남 지방 사람들인데, 그들은 주로 요녕성(심양)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래서 길림성 사람들의 말씨에는 이북 억양이 강하게 들어 있고, 경상도 말씨는 흑룡강성에 널리 퍼졌으며, 삼남 지방 말씨가 요녕성 등지에 흩어지게 된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만주행은 주로 경북 북부지방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이라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같이 가져간 만큼 결속력도 끈끈해 만주 벌에다 집단 거주지인 <안동촌>, <풍기촌>을 형성하여 살게 된다. 소위 조선족 사회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반도 내 활동이 어려워진 조선 독립운동의 상당 부분을 감당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초창기 독립운동은 정면 대결이었기에 병력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 등에 치중했지만, 잘 갖추어진 일본군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이에 장기전 대비를 위한 ‘민족정신’ 앙양이 절실했고, 이를 위해 학교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이때 세워진 조선족학교를 우리는 「민족학교」라고 부른다. 「민족학교」는 원칙적으로 우리말을 사용하고, 우리 문화를 계승하였다.
한때, 「민족학교」는 소·초중·고중을 합해 1,000여 개가 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중국 내 근대화 과정의 이촌향도 현상, 한국을 비롯한 국외로의 인구유출, 그리고 대학 입시에서의 소수민족 가산점을 없애버린 당국의 정책 때문에 가오카오(대입 수능)를 치러야 하는 학생들이 속속 한족(중국어) 학교로 편입해 갔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내 「민족학교」는 200여 개를 겨우 헤아리고 있다.
그것도 1교 수천 명씩이나 되던 학생들이 이제는 100명을 못 채우는 학교가 수두룩해졌다고 한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학교마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민족학교」의 폐교는 그나마 애써 지켜내던 우리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주는 중국 땅이다. 눈 밖에 난 소수민족 조선족을 그들이 힘써 도와줄 리 만무하다. 모국이 한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조선족들은 그들이 만든 한글 교과서가 사라지게 되는 비통함 앞에 서 있다. 한글이 퇴출당하면서 중국어로 수업하고 간판이 중국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일찍부터 중국 당국은 조선족 사회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워 왔다. 중국 내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미 상당수 한족에 동화된 반면, 우리의 조선족들은 끝까지 우리말을 지키고 조선족끼리만 통혼하곤 하며 버텨왔는데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재중동포도 러시아의 카레이스키처럼 한국말을 아예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 안쓰럽다. 조선족자치주의 존립 근거도 흔들린다.
1952년 조선족자치구 성립 당시 70% 이상이던 조선족 비율이 2020년 30%로 뚝 떨어졌다. 한족이 조선족보다 곱절 더 많아진 셈이다. 따라서 70년간 유지되던 한글중국어의 보조 표기로 바뀌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아예 한글이 싹 지워질지도 모른다.
밥벌이를 위해 대도시로 갈 수밖에 없고, 돈을 벌러 국외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조선족 이탈 현상으로 분해되어 가는 「민족학교」를 중국 당국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1899년 북간도의 이상향을 꿈꾸며 이주한 개척자, 1910년대 독립 항쟁을 맹세하며 민족문화 계승을 위해 목숨 건 이들의 노고를 차치하고, 공연히 올림픽 한복 트집이나 하는 중국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한국인을 바라보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