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봄이다. 올봄은 그 어떤 봄보다 의미가 깊다. 마스크도 벗을 수 있으니 거리낄 것이 별로 없다. 이제는 주저함이 없이 집을 나설 수 있다. 지난 3년간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그나마 올봄은 답답했던 마스크도 벗고 콧바람도 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이 없다. 물론 엘리어트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여 삼라만상이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 그렇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올봄만큼은 마스크를 벗고 봄을 마음껏 즐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한 삼 년간 마스크를 쓰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마스크를 쓰니 감기에 걸리지 않아서 좋았다. 기관지가 나쁜 사람들에게는 마스크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해서 불편했으나 오히려 마음 편안함도 있었다. 바깥출입이 부담스러운 사람도 마스크를 쓰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괜한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왠지 사람들이 불편할 때는 마스크 안에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도 했다.
이하(李夏)의 시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가 있다. “비킬 뿐/ 산은 산을 가리지 않는다./ 낮은 데로 낮추어/ 소리도 묻어나지 않게/ 앞은 앉고 뒤는 서고/ 크면 큰 대로 빛깔을 던다.” 멀리 보이는 산의 모습을 예리하지만 아름답게 그렸다. 앞산은 뒷산을 가리지 않기에 아름답다. 앞산이 높다 싶으면 앞산은 앉고 뒷산은 서는 것이다. 그렇게 적절하게 키를 맞춘다. 대신에 앞산이 짙은 초록이라면 뒷산은 키가 큰 대신에 초록의 빛깔을 던다. 서로 가리지 않고 양보하면서 조화로운 세상을 꿈꾼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소백산의 모습이 그렇다. 산이 산을 가리지 않는다. 낮은 산은 앞에서, 소백산은 가장 높기는 하지만 멀찍이 물러나서 가장 뒤에 서 있다. 석양 무렵이 되어 하늘이 노을을 던진다. 소백산은 아무리 높아도 노을을 다 받아들이지 않고 은은하게 앞산의 물을 먼저 들인다. 산과 하늘이 만들어낸 절묘한 광경이 신비스럽다. 가리지 않으니 이리저리 잘 어울린다. 누가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편 생각해 보면 앞산이나 뒷산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살짝 가릴 때도 있다.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 앞산은 뒷산에, 뒷산은 앞산의 모습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앞산이 흐릿하고 뒷산이 너무 푸르면 그것보다 볼썽사나운 것이 없다. 이럴 때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살짝 가려서 가면을 쓰는 것이 오히려 주변 상황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가리고 가면을 쓰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아름다운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리지 않아서 진실하지만 가려서 조화롭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면을 쓴다. 심리학자 융은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하면서 가면은 사회적 상황에 자신을 맞추려는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는 가면을 꼭 써야 할 때가 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슬픈 상황에서는 웃을 수가 없다. 슬픈 표정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이 산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앞산이든 뒷산이든,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자기의 모습 그대로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서로 가리지 않고 각각의 자리에 든든하게 서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면 곤란하다. 뒷산은 키가 크니 색을 조금 내어 주면서 살짝 여린 색으로 얼굴을 가려야 한다. 그래야 그림이 되고 조화로운 삶이 된다. ‘가리다’는 게 이렇게 아이러니하고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