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광복단은 우리나라 최초 무장 비밀결사대이다. 일제의 무단 통치가 극에 달하던 1913년, 풍기읍 동부리 251(구름밭)에서는 채기중을 중심으로 팔도에서 모인 19명의 항일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지금의 ‘풍기인삼갈비식당’ 근처이다. 처음에는 한말 의병 출신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가 곧 계몽운동가, 지역 유림, 감록촌 유입 인사 등이 가세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그리고 그들은 조직적인 대일 항쟁을 벌였다. 특히, 영주에 ‘대동상점’이라는 위장 업체를 운영하여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그러나 1918년 조직망이 발각되면서 주모자 채기중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고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게 된다.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 1873~1921)은 한말의 의병이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함창현 봉평마을(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출생한 채기중은 34세 되던 1906년 봄,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풍기면 서부리 한림촌으로 이사를 한다.
풍기는 정감록 신봉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유동 인구가 많았고, 소백산 깊은 골짜기는 이들 지사가 피신하기에 용이 한 곳이라는 점이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기로 이주한 채기중은 이듬해인 1907년 8월의 풍기·순흥 전투를 경험하고, 또 11월에는 치열했다는 죽령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후 그는 본격적으로 동지들을 모아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12년 봄 결성된 초기의 결사대는 의병 출신이 중심이었다. 1913년엔 항일 결사대가 정식으로 결성되었고, 곧 근처 유림이 합세하면서 80여 명의 인원이 확보되었다. 이듬해에는 단원 수가 2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풍기학교 훈도인 박제선 등의 활약으로 영주 읍내에 ‘대동상점(현, 동림당한의원 자리)’이라는 위장 업체를 차렸고, 이를 통해 모은 수만 원의 자금으로 무기를 사들여 행동에 나섰다.
이윽고 1915년 음력 7월, 채기중의 <풍기광복단>은 전라도의 독립의군부(고종의 명으로 임병찬이 창단),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박상진) 등과 합세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하는 <대한광복회>를 출범시켰다. 박상진을 총사령, 만주 담당 부사령은 이석대(후임 김좌진)로 하고 각 도에 지부를 결성하였다. 12월에는 만주 본부 성격의 ‘길림광복회’까지 설립되었다. 그러던 중, 총사령 박상진이 대구권총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채기중이 조직을 사실상 지휘하면서 <대한광복단>으로 재정비하였다.
<풍기광복단>으로 시작된 <대한광복단>은 약 10년간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악질 친일 부호 처단 등의 사건이 일경에 노출되면서 단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1919년 9월 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박상진·채기중 등 지도부가 사형선고를 받음으로써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만주의 의열단이 대한광복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결성되었고, 국내 3·1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가 이를 정신적 초석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활동으로 평가된다.
현재, 풍기광복공원이 해마다 추모 행사를 열지만, 출생지인 상주의 봉평마을 인천채씨 문중도 채기중의 생가를 복원하는 한편, 마을 앞 도로변에 만세공원을 만들어 채기중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