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다. 춥고 어려울 때는 대부분 사람은 꼼짝하기가 싫고 불편하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선수들마저 추운 겨울이 되면 따듯한 곳으로 동계 훈련을 떠난다. 동계 훈련 여하에 따라 다음 해 성적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마냥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구 중에 아무리 바람이 불고 추운 밤이라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별을 가리키며 금성, 화성, 목성을 얘기하는 친구가 있다. 추워서 어깨를 굽히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 친구가 무척이나 든든했다.
매년 추운 겨울이 되면 버릇처럼 한 사람을 꼭 기억 속에서 꺼낸다. 이육사(李陸史, 1904~1944)다. 중학교 교과서를 읽을 때부터 지금까지 육사는 가장 신기하게 다가온 시인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청포도가 있었는데 시 ‘청포도’를 읽으면서 깊은 뜻을 이해하기보다는 우리 집에 청포도가 있다는 생각에 그 시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에는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변절하지 않고 강직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던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더 육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정말 범인(凡人)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분이다.
육사는 한겨울에도 씨를 심는 사람이다. 육사는 이런 시로 감옥에 갇혔지만 나는 육사의 감옥에 갇혔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 「광야」의 마지막 부분이다. 「절정」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와 함께 육사의 시 중에서 가장 절창으로 회자가 되고 있다.
육사는 눈 쌓인 광야에 씨를 뿌린다. 상상컨대 어떤 사람이 눈 쌓인 광야에서 눈을 헤치고 땅을 판 다음 씨를 뿌린다고 가정해 보자. 속된 말로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 매화 향기는 아득하니 봄은 아직 멀었다. 보통 봄에 파종하는데 육사는 한겨울에 씨를 뿌린다. 그것도 눈을 쓸어낸 다음 튼튼한 씨를 심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노래의 씨를 심는 것이다. 우리 같은 평범으로는 그 경지를 알 수가 없다.
육사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다. 춥고 언 땅에 묻힌 씨는 죽지 않는다. 언젠가는 노래의 씨는 싹을 틔울 것이며 새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오고 새잎이 나서 큰 나무로 변한다. 노래의 나무에서 울려 퍼진 노래가 온 광야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니 겨울은 강철같이 차고 고달픈 계절이 아니라 무지개 같은 희망으로 가득할 수 있다. 이것은 상상력의 차원을 넘어서 예지나 예언에 가까운 경지라고 하겠다.
겨울은 담금질의 계절이다. 풀무 불에 벌겋게 달궈진 쇠를 몇 번이나 찬물에 넣어 급격하게 식힌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쇠는 더욱 단단하게 되고 갖가지 연장으로 만들어진다. 이런 담금질의 시간이 없다면 그야말로 맥없고 쓸모없는 쇠붙이가 될 수밖에 없다. 육사가 한겨울에 씨를 심는 것도 담금질이요, 봄을 기다리며 씨를 갈무리하며 부지런히 봄을 준비하는 마음 또한 같은 것이다.
누구나 삶이 어렵거나 앞이 캄캄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도 있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살아가는 게 힘겨울 때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다. 육사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정신 속에 살아 있다. 한겨울에 씨를 심으면서 그 넓디넓은 광야에 노래가 가득 울려 퍼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 추운 겨울이 되면 육사를 생각하면서 삶의 끈을 다잡아 보는 것이다.
절기 중에 소한, 대한이 지나면 바로 입춘(立春)이다. 이제 소한이 지났으니 입춘도 얼마 남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에 추운 겨울 들판에 나가서 계묘년 광야에 퍼져나갈 씨를 심어야겠다. 노래의 씨도 좋고 꿈도 좋으니 추위를 떨치고 일어나야겠다. 한겨울에 씨를 심은 육사가 자꾸만 등을 떠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