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49] 비운의 천재 김시습의 청량산 탄식 <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 오피니언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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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확대경

배용호 (전 영주교육장)

배용호의 문화확대경 [249] 비운의 천재 김시습의 청량산 탄식

2023. 01. 06 by 영주시민신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5세 때 『대학(大學)』을 통달하고 신동이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전국 산천을 떠돌며 승려처럼 무위자연의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시습은 지금의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는데, 5세에 이미 세종대왕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아 나라의 큰 재목감으로 약속되어 있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를 ‘5세’ 또는 ‘김오세’라고 불렀다고 한다. 설악산 ‘오세암’도 바로 그가 공부했던 암자이다.

아이가 총명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정승이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늙을 로(老) 자로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즉석에서 “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하여 정승이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어 대궐에서도 그를 시험하였는데, 세종이 “동자의 학문은 마치 백학(白鶴)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을 추는 것 같구나”라고 하자, “어진 임금님의 덕(德)은 마치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노는 것 같습니다”라고 응답하여 왕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그의 나이 15세에 들면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 의탁하게 되고, 3년이 못 되어 외할머니마저 별세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었던 비운의 신동이었다. 또, 나라에서는 세종과 문종이 잇달아 승하하니, 12세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김시습은 과거 준비차 삼각산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게 된다. 통분을 참지 못한 시습은 공부하던 책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머리카락까지 잘라버리고 하산하여 세상을 방황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로부터 장장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천재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루는 한강을 지나다가 정자에 걸린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통분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라는 시였다.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두 글자를 고쳐 놓았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김시습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고, 그의 행동은 더욱 기이하기만 했다. 책을 읽다가 통곡하기도 하고, 지은 시(詩)를 마구 찢어 버리는가 하면, 글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활을 당기는 등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생활로 자학하면서도 마치 불자(佛者)처럼 살아가던 김시습이 47세 되던 해 어느 날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부인이 세상을 뜨고, 폐비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을 본 김시습은 또다시 방랑길을 오른다. 그 후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저리는 가슴으로 부여의 무량사(無量寺)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 들었던 김시습은 그곳에서 5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평생을 그는 속세와는 단절하고 있었지만, 살벌한 시대 속에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수습하여 생육신의 반열에 오른 절의의 선비였고, 경주 금오산에 7년 동안 엎드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탄생시킨 불후의 천재였다.

김시습이 청량산에 들어 세상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쉬었다는 시(詩)가 전한다.

「淸涼山上禮文殊 却說塵中不自由 算盡世間多白髮 碧杉松下一長吁(청량산에 올라 문수보살에 절하고/ 물러와 티끌 세상 삐뚤어진 일을 각설한다/ 세간에 이리 저리 치이다 보니 백발만 성성해졌는데/ 푸르른 전나무 아래에서 탄식 한번 길게 내뱉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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