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될 때마다 떠오르는 어릴 적 풍경이 있다. 그때만 해도 마을마다 농악대가 있었다. 정월 보름이면 집집이 다니면서 농악을 하며 한바탕 춤추고 논다. 철들어 생각하니 바로 지신밟기였다.
농악을 통해 잡신과 악귀를 물리치고 가정의 안녕과 복을 빌어주는 것인데 아직도 귀에 생생한 상쇠의 앞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앞마당에 들어와서 구구절절이 복을 비는데 딱 하나 기억나는 구절 때문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아들을 낳으려면 대통령이 나오소.” 복을 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정말이지 우리 집에 대통령이 나올 줄 알았다.
복을 빌어주는 게 이렇게 힘이 있다. 물론 우리 집에 대통령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 다만 지신을 밟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복을 빌어주던 장면이며 꼭 그렇게 이루어질 것만 같았던 어린 꼬마의 흥분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지지리도 어려웠던 시절에 집이 부자가 되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며 대통령까지 나온다고 하니 흥분하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맞는 방식이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복을 빌어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어릴 적 어르신들에게 나도 모르게 배울 수가 있었다.
복 복(福)과 부할 부(富)에는 가득할 복(畐)이 들어 있다. 畐은 배가 불룩한 항아리를 닮은 모양의 상형이다. 항아리가 가득 넘쳐서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복(福)은 示와 畐가 합해졌다. 示는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가 하늘에 닿아 비가 줄줄 내리는 모습을 본떴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福은 비가 내려 항아리에 물이 가득한 것을 의미한다. 富는 집에 놓여 있는 항아리가 가득하다는 것이니 부할 수밖에 없다. 복을 받는 것은 물이든, 술이든, 쌀이든, 돈이든, 목숨이든, 자식이든지 항아리에 가득 차는 것이니 사람들이 싫어할 리가 없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복(福)을 만났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최초로 사람들에게 던진 말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역설이다. 가난은 정말이지 우리를 너무나 괴롭혔다. 나이가 들어 가난에서 벗어났을 때 이런 결론을 내렸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그런 가난이 복이라고 하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를 모두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이었다.
부탄은 대부분 국민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흔치 않은 나라다. 정책의 방향도 ‘행복한 사람은 더 행복하게, 불행한 사람은 행복하게’이다. 첫눈이 오는 날을 공휴일로 지정한 나라다. 강대국을 지향하지 않는다. 부자를 꿈꾸지 않는다. 자연보호가 가장 중요하다. 행복을 위해서 서두르지 않는다. 『행복한 나라 부탄의 지혜』 목차들이다. 목차만 봐도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정책의 방향은 우리와 틀리지 않으나 정책의 실행은 우리와 정반대인 것 같다. 그냥 한 마디로 신기할 뿐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첫눈 오는 날이 공휴일이라니!
새해에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복을 가득 받았으면 좋겠다. 올 경제가 어렵다지만 집 안에 있는 항아리에 물이 가득하고 재물이 가득해서 흘러넘쳐도 좋겠다.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전적으로 하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도 있겠다. 부탄처럼 첫눈이 내리는 날은 하는 일을 멈추고 훌훌 떠날 수 있는 낭만도 한 번쯤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에서 어우러져야 복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 좋은 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복이란 걸 꼭 경제적으로만 풀 일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畐의 상형인 항아리를 사람의 마음으로 풀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말을 마음에 가득 담는다.’라고 풀이한다. 어쨌거나 하늘 아래에서 땅을 디디고 살아가면서 넘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복일 수 있다. 물론 꼿꼿하게 서 있으려면 좋은 것을 먹고 따듯한 옷도 입으면서 주머니도 두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뜻을 마음에 담는 것이 복을 받는 첫 출발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