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독립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계몽인으로 불리며, 191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했던 장본인이다. 측량기사 출신인 그가 한동안 봉화 명호의 한 금광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조동호는 1892년,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난다. 18살 때 경성측량학교를 졸업한 측량기사로 출발한다. 한번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싸움을 목격했는데 일본 순사가 일방적으로 일본인 편만 드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일본 순사 5명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첫 유치장 출입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조동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듯 하게 된다. 일제의 감시로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22살 그는,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독립지사 신규식(申圭植)의 추천으로 난징의 진링대학 중국어학과를 졸업한다.
26세 때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27세에 상하이 임시정부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29세 때에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연설했다.
그런 활동 도중 상하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국내에 들어와 논산 갑부 윤희중(尹希重)의 도움으로 ‘중앙일보’를 인수해 언론 활동에 치중하면서 44세 한참 늦은 나이로 의열단 출신의 딸과 결혼하지만, 연이어 손기정(孫基貞)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신문은 폐간되고, 그는 지명 수배자가 되었다.
이때 그를 받아들인 게 명호 기르마재에 있는 한 금광이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는 “이곳 봉화에 피신해 살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지각 결혼이었지만, 부인과 갓난 딸이 함께 있었고, 아들 윤구(潤九, 1939~2013)가 이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동호는 지금까지의 투사적인 강렬한 인상과는 전혀 대조되는 모습이 그림처럼 남아있다.
「대륙광업사」는 인부들이 채취한 사금(砂金)을 사들이는 현장 사업소이다. 그가 현장 일을 볼 때는 다른 직원들보다 10% 정도 더 얹어 매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부들은 유독 그가 나와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를 안 사장[金基祥]이, “선생님, 그러면 우리 회사는 망합니다.”하며 웃어넘긴 일화가 박제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유정 조동호는, 나라를 되찾는 큰일에 투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운 민중들을 항시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끝까지 독립투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민중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광맥에서 찾아낸 유정의 훈훈한 울림이 매서운 엄동설한의 추위를 좀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