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계몽운동은 기층민의 의식 계도를 위한 조직적인 운동이었다. 영주의 계몽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게 시작되었다. 계몽운동을 주도해야 할 유생들이 대거 의병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계몽운동은 1904년 국민교육회로 시작하여, 1905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영주에서는 「교남학회(嶠南學會, 교남교육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유생들의 참여가 나타난다. 교남(嶠南)은 영남(嶺南)의 다른 말이다. 1908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 선각자들이 계몽사상의 보급을 위해「교남교육회」를 조직했을 때, 영주·순흥·풍기 등 지역 유생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이리하여 영주의 계몽운동은 교남교육회가 주축을 이루고, 1906년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힘을 얻어 신교육기관인 소흥학교(紹興學校, 1906, 순흥초), 안정학교(安定學校, 1908, 풍기초), 조양학교(朝陽學校, 1908), 강명학교(綱明學校, 1909, 영주초), 내명학교(內明學校, 1910, 내명초) 등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이전, 구한말에 일어난 교육 사건이어서 크게 주목받는다.
구한말 계몽운동의 핵으로 꼽을 수 있는 이들 학교는 보통학교에서 공립 심상소학교, 국민학교, 초등학교 등으로의 개편을 거치면서 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된다. 다만, 조양학교만은 공립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잊힌 이름이 되었다.
1967년 간행된 『흥주지(興州誌)』 학교조(學校條)를 보면, 「朝陽學校 在府內 陶熙戊申 始設新學〯〮 ○今廢」라고 적혀있다. ‘陶熙’는 ‘隆熙’의 오기로 보이는데, 융희 무신년이 1908년이므로, “ 조양학교는 순흥부 내에 있었고, 1908년 처음 설치된 신학 교육기관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또한,「朝陽書堂 在府東 水息面 鴨洞 士林講學之所 ○今廢」라는 기록도 있다. “조양서당은 순흥부 동쪽 수식면 압동에 있는 사림의 강학 장소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풀이된다. 즉,「조양서당」을 개편하여 근대학교를 개설했던 걸로 짐작된다.
조양학교는 조양서당이 소재했던 ‘순흥부 수식면 압동(현, 봉화군 물야면 압동리 250-2)’ 죄기 마을 동사골에 있었던 학교이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죄기’의 한자 표기를 ‘朝陽’이라고 쓴다. 부석과 물야의 중간쯤 길목에서 샛길로 다시 얼마간 더 들어가는 한적한 산골 마을이다. 이런 산중에 순흥초, 풍기초, 영주초등학교와 어깨를 견주는 근대 교육기관이 일찍이 설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낸 정문흠(鄭文欽, 제2·3·4대) 국회의원이 이곳 조양학교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죄기(조양) 마을은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석양(夕陽)의 대칭격으로서 ‘아침 해가 뜨는 동산’을 의미한다. 봉황산이 바로 보이며, 오동나무가 자생하기에 봉황의 서식 조건도 갖추었다.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이 우는 곳, 저 높은 산이로다. 오동나무가 자라는 곳, 해가 뜨는 동산이로다[鳳凰鳴矣 于彼高崗 梧桐生矣 于彼朝陽]” 했다. 또,「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는 말이 있는데, ‘봉황이 해 뜨는 동산에서 운다’는 뜻으로, 천하가 태평할 조짐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상서로운 뜻을 지닌 「조양」은 개화기 전국 곳곳에 나붙었다. 초창기 학교에는 조양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많았다. 건물도 조양회관, 회사도 조양식품, 궁궐도 조양루가 있으며, 일본에도 조양각, 중국에도 차오양[朝陽]구, 조양소학교 등이 있다.
이처럼 죄기 마을 조양학교는 비록 단명했지만, 봉황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그 여운을 오래도록 남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