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인 음식을 먹는다. 고기류에 매운 음식을 곁들여 먹으면서 위장을 자극한다. 위장이 약한 사람들은 금방 탈이 난다. 부글부글 속이 끓는다. 쓰리고 아프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기도 하고 편치 않은 속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차라리 먹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끓는 속을 움켜쥐고 배설이라도 하고 나야 속이 편해진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렇다. 자극적인 표현이 판치는 세상이다. 거친 말이 아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가 없다. SNS나 유튜브에 올라오는 글이나 말을 읽어보면 기가 찬 말이나 표현들이 수두룩하다. 걸러지지 않은 말이나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지니 더욱 말이 자극적으로 변한다. 말이 속에서 숙성되지 않고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와서 배설하듯이 그냥 쏟아지는 것이다.
풍자(諷刺)라는 말이 있다.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나 인간들의 결점, 모순 등을 빗대어 비웃으면서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풍자의 궁극적 목적은 대상을 찔러서 비판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웃음이 있고 해학이 있다. 말의 격이 있으며 점잔과 여유가 있다. 탈춤에 양반의 권위나 위선적인 행위를 풍자하는 대사를 보면 재미가 있어서 박장대소하지만 보는 가운데 속이 후련하다. 풍자는 들어서 아픈 말이지만 거기에는 웃음과 같은 넉넉함이 있다.
배설을 입에 올리기가 거북하기는 하나 음식물을 먹고 배설하지 못하면 병을 얻는다. 사람의 감정 또한 배설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여 두고 있으면 큰 병을 얻을 수 있다. 감정의 찌꺼기는 반드시 밖으로 표출해야 마음이 후련하다. 문제는 감정이 정제되지 못하고 통제됨이 없이 그냥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감정이 통제됨이 없이 자극적으로만 표출될 때 오히려 공동체의 병이 될 수 있다. 그만큼 감정 조절은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기에는 속이 차지 않는다. 자신의 주변만 보면 살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눈만 뜨면 바로 앞에 현실이 있고 세계가 있다. 이 거대한 상대를 두고 논리적인 말이나 정제된 언어로는 감당하기도 어렵고 이길 수도 없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찔러 볼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이 거대한 폭력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폭력에 맞설 수 있는 무기는 자극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떠오른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의 마지막 구절이다. 만해의 가슴에 ‘님’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의 노래가 흘러넘친다. 온 세상을 덮고도 남을 사랑의 노래를 님을 향해 부른다. 그러나 님은 침묵하고 있다. 쓰다 달다 말도 없고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듯이 침묵하면서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해의 사랑 노래는 끝없이 님을 감싸고 님의 주위를 끊임없이 돈다.
「님의 침묵」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만해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는 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침묵하는 님이 있기에 만해는 노래 부를 수 있었다. 사랑하는 님이 침묵하면서 손을 내밀지 않아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침묵을 깨고 다가오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해가 캄캄한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로 이런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해는 상황의 폭력을 결기 있는 부드러운 사랑 노래로 결국 넘어선다. 부드러움의 역설이 시 깊숙한 곳에 들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침묵의 시대는 아니다. 마냥 부드러운 사랑 노래만 부를 수 있는 그런 현실도 아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서 점잖게 걷다 보면 어느덧 뒤처지고 마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제되지 않고 자극적인 말로 사람들을 찔러 쪼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만해의 역설이 있는 것이다. 가끔은 부드럽지만 강하고 자극적이지는 않으나 정신이 번쩍 드는 격조가 있어야 한다. 감정을 자극하여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감정과 따뜻함으로 현실을 넘어서는 넉넉함이 아쉬운 요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