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로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서 내매교회(乃梅敎會)에 도착했다. 계단을 오르니 수몰 전 내매 동네 사진 전경이 있고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가 있다. 오래된 종탑이 내매교회의 역사를 말하듯 서 있고, 내명학교(內明學校) 이전 복원 기념비도 서 있다.
국민일보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교회 팻말과 함께 1919년 3·1운동 참여 교회 기념패도 걸려 있다. 복원된 내명학교 건물과 함께 1995년 폐교로 인한 내명초등학교 교적비가 건물 앞에 있다. 주위를 잠깐만 둘러봐도 역사, 민족, 전통, 교육, 신앙 등과 같은 말들이 술술 따라붙는다.
내매교회 앞에서 수몰된 내매 마을을 바라본다. 성지산 아래 따듯한 양지에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내명학교 터는 콘크리트 도로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어디에도 없다. 내매교회도 마찬가지다. 아담하게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쁜 교회도 수몰되어 흙물에 잠겨서 흉한 갈대숲으로 변했다. 피서를 가 다리 그늘에서 놀면서 물장구치며 즐기던 내매 다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매는 내성천에서 내(乃)자를 따고 매화낙지(梅花洛池)에서 매(梅)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뒤에는 성지산이 어머니처럼 솟아 있고 앞에는 내성천이 부드럽게 휘감아 간다. 양지마, 음지마 사람들은 금모래 빛이 따스한 내성천에서 만났다. 목욕도 하고 놀기도 하면서 내매에서의 추억을 쌓았다. 내매는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다. 전쟁이 없고 평화가 깃든 땅을 찾아 헤매던 중 내성천이 흐르다 매화낙지를 만나 절승(絶勝)을 이룬 내매 땅에 정착했다고 한다.
내매교회는 1906년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다. 강재원 장로가 대구에서 선교사 베어드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향 내매 유병두 씨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처로 시작하여 차츰 교회의 모양을 갖추어 나간다. 그러면서 북부지역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10여 개 교회가 세워지는 못자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떨어져 큰 나무가 되듯이 내매교회는 경북 북부지역의 기독교 신앙의 산실이 된다.
내매교회가 영주지역의 신문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1910년 내명학교를 설립하였다. 내명학교는 신문화와 민족주의 교육을 표방하며 1913년 개교하여 1946년 내명국민학교로 승격하여 인재 배출의 요람으로 성장하다가 1995년 폐교되었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교계, 학계, 실업계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인물이 많았다. 특히 목회자를 33명 배출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 되고 있다.
내매 사람들에게는 내매 정신이 있다고 한다. 한 마을이 지향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말은 들어보기가 쉽지 않다. 나장골에 살았던 50여 가구가 모두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니 자부심과 함께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 정신이 싹텄을 것이다. 그 정신이 내매교회 향약 6개조에 나타난다. 구습을 타파하고 도박과 주막 출입을 금하며 상호 간에 서로 부조하면서 깨끗한 신앙촌을 만들고자 하는 정신을 새겨 넣었다.
교회 안에 들어서면 내매 마을 사람들이 쓰던 탈곡기와 교회에서 반주로 쓰던 풍금이 있다. 탈곡기에는 113년 세월을 함께한 내매 마을 풍경이라고 했고, 풍금에는 1956년에서 1960년까지 교회에서 사용했다고 쓰여 있다.
어느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가더라도 탈곡기와 풍금을 보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수몰된 마을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것이라 보기에 더욱 애잔하다. 탈곡기로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고 풍금 반주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남다르다.
그루터기라는 말이 있다. 나무를 베면 밑에 두꺼운 뿌리 부분만 남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베어져서 죽은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루터기에서 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서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수몰된 내매와 내매교회를 보면서 그루터기가 떠올랐다. 비록 수몰되어 잠기고 갈대만 쓸쓸하지만, 그들이 꿈꿨던 내매 정신은 그루터기로 남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