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만에 부석사 계단을 올라 보니, 휴일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누구는 ‘부석사 아랫도리에 쥐가 난다’라고 표현한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의 세계유산 지정과 만삭의 은행잎 단풍이 부르는 소리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마침 사과 축제까지 열리고 있어 그런 홍역(?)을 앓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배흘림기둥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전화기에 은행잎 단풍 노란 소식을 어디론가 열심히 보내는 모습이다. 모두 부석사 계단에서 보는 행복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부석사가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노라 하던 사찰도 민중들의 시주로만 버텨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조와는 달리, 사찰을 지원하지 않았던 조선조의 그늘은 두꺼웠다. 19세기 들어서는 어려움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조사당 수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잘 보관하던 목각탱을 문경 대승사로 넘겨야 했고, 1868년 사세가 기울어 극락암 뒤편의 산자락을 안동 모 가문에 250금(金)을 받고 팔았다는 문서가 있다. 아예 극락암을 허물어 그 재목과 기와를 처분한 대금으로 공납을 납부했고, 또한 불기(佛器)는 물론 가마솥까지 팔아야 했단다. 범종각(루)의 범종이 사라진 것도 이 시기로 보고 있다.
정면은 팔작지붕, 뒷면은 맞배지붕이라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진 범종각은 말 그대로 범종을 매달아 종을 치던 전각이다.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찰의 범종각이 일반적으로 사찰의 좌우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부석사의 범종각은 사찰 진입 중심축선에 위치하고 동시에 아래층은 출입을 겸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가운데 칸으로 계단을 둬 안양루로 진입할 수 있는 형태이고 지붕 내부에 중창 당시 것으로 추정하는 단청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범종각에는 범종이 없다. 범종각의 주인인 범종은 어디로 가고, 목어와 법고 그리고 운판 등 나그네들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범종은 19세기 무렵에 그 행방이 묘연해 지는데, 일설에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축하면서 공출해갔다는 루머와 일제시대 전쟁물자로 약탈당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태백산사고의 관리를 맡게 되면서 그 비용 마련을 위해 범종을 처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백산사고’를 지키기 위한 세금인 ‘정조(精租)’를 갑자기 해마다 100두(斗)씩 바쳐야 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부석사의 우람하고 웅장했던 범종은 사라졌다. 대신, 그 옆의 다른 종각에 조그마한 범종을 새로 만들어 달아 놓았다.
한편 안양루는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사찰의 진입 축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도록 배치한 점, 무량수전으로 가는 주 출입문으로 누각 아래로 진입하도록 한 형태인 점, 공포와 대들보의 구성 등에 조선 중기 또는 그 이전에 사용된 기법이 남아있는 점 등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런 범종각이 안양루와 함께 지난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부석사는 국보 5점, 보물 9점으로 모두 14점을 보유하게 되면서, 불국사(13점)를 제치고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국가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이 되었다.
